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비가 달라졌다. 1994년 여름 오랜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내가 고국 땅에서 처음 접한 비는 어려서 맞던 장맛비가 아니었다. 연구를 위해 늘 드나들었던 중남미 열대에서 맞던 열대비에 영락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 빗소리만 듣고도 우리나라가 아열대화하는 것 같다는 칼럼을 썼다가 기상학자들에게 뭇매를 맞았던 기억이 새롭다. 이젠 그분들이 더 앞장서서 아열대 얘기들을 한다.
지난 16일에는 경남 마산에 시간당 최고 102㎜의 폭우가 쏟아졌다. 부산에도 시간당 90㎜의 비가 퍼부어 주택가 비탈길에 세워 두었던 차들이 도로 입구까지 쓸려 내려가 무너진 벽돌들과 뒤엉킨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쯤 되면 물걸레가 아니라 거의 세차장 호스 수준이다. 소설 '장마'에서 외할머니가 퍼붓던 저주의 말이 이제 우리 앞에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더 쏟아져라! 어서 한 번 더 쏟아져서 바웃새(바위 사이)에 숨은 빨갱이마자 다 씰어(쓸어) 가그라!"
2002년 태풍 루사는 하루 동안 870㎜의 비를 쏟아 강릉의 바위틈을 후벼 파내 동해 바다로 쓸어버렸다. 지금 서울과학관에는 뉴욕자연사박물관 기후변화 체험전(展) 'I LOVE 지구'가 열리고 있다. 전시회에서 가장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870㎜의 폭우에 잠긴 서울의 미래 모습이다. 남산 기슭의 한옥마을이 처마 밑까지 물에 잠기고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는 허리춤까지 물이 들이찬다. 비가 100㎜씩 8~9시간만 내리면 벌어질 일이다.
예전에는 한강이 범람하여 마포와 영등포가 물에 잠겼다. 앞으로는 강이 범람하지 않아도 도시에 떨어지는 빗물만으로도 도시의 기능이 마비될 것이다. 강만 정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도시의 인프라 자체를 재정비하지 않으면 기후변화의 대재앙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우리 국민 모두에게 이번 여름 기후변화특별전 관람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