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방

간장도시락/ 김성근

이예경 2009. 7. 26. 11:05

간장 뿌린 도시락 보고 '너, 조센징…' 이지매-돌팔매질…일주일 학교 안가

 ▶환경을 역이용하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김성근(카네바야시 세이콘)은 코흘리개 때부터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했다.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와 형, 밥벌이에 눈코 뜰 새 없는 누나들. 누구 하나 옆 돌아볼 틈이 없었다.

"중학교 입학하면서 야구부에 들어갔죠. 그냥 재미있어서요." 배부른 소리 같지만, 그 길은 처절했다. 돈 때문이었다.

"차비가 없어서 늘 걸어 다녔지요. 집에서 학교까지 10㎞였는데. 산더미 같은 야구가방에 책까지 넣어 다녔어요. 6시간 정규수업을 다 했거든요." 그 먼 길을 오가며 개인훈련을 했다. 종아리 근육을 튼튼하게 하려고 뒤꿈치를 들고 철길 따라 걸었다.

3학년이 되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4시부터 우유와 신문을 돌렸다. 그 시간도 훈련으로 활용했다.

"우유 돌리는 시간을 매일매일 쟀습니다. 빈병과 바꾸는 시간, 자전거 타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갔지요. 허벅지 근육 단련하려고 자전거는 서서 탔습니다. 단 한 번도 앉아 본 적이 없습니다. 페달도 발끝으로만 밟았고요. 우유보급소 자전거가 제겐 운동기구였습니다. 신문도 어떡하면 정확하게 던져넣을 수 있는가를 매일 연구했어요."

 ▶아이들의 돌팔매

새벽 아르바이트, 20㎞ 도보 등하교 따위는 일도 아니었다. 이미 초등학교 때 험한 꼴을 당한 터였기에.

"입학하자마자 도시락을 싸 갔어요. 점심시간에 뚜껑을 열었는데 반찬도 없이 밥 위에 간장만 뿌려져 있더라고요. 일본 아이들은 주로 계란말이를 싸왔는데."

도시락 모양새로 '조센징'임을 알아차린 아이들이 '이지메'를 가했다. 교탁 밑 방공호에 몰아넣고는 돌팔매질을 했다.

"일주일을 학교에 안 갔습니다. 간장 뿌린 도시락을 강둑에서 까먹으며 온갖 생각을 다 했지요. 그래도 가족과 친구들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그때 돌 던진 녀석들이 지금도 저를 만나러 한국에 옵니다."

 ▶삽질로 화두를 풀다

돈이 없어 번듯한 야구팀이 있는 사립고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립 카츠라고교에 시험을 봐서 들어갔다. 그 학교에도 야구부는 있었지만, 감독도 없고 인원이 모자라 경기 때 아르바이트생까지 샀을 정도라니 말 다했다.

"거기서도 2학년 때까지 경기에 못 나갔어요. 달리기 못한다고 끼워 주지도 않더라고요. 선수도 아니었죠. 배팅볼조차도 못 던지게 했으니까요."

그래서 주로 집 근처 강가에서 혼자 연습했다. 강에다 돌을 던지며 투구 연습을 했고, 대나무 방망이로 돌을 날리며 타격 연습을 했다. 강물이 포수였고, 외야수였다. "혼자 돌 던지고 치니까 돈 안 들어 좋더라고요. 허허."

고교생이 되어서도 버스비 10엔이 없어 여전히 걸었다. 어쩌다 돈이 생겨 버스를 타도 앉지 않았다. "훈련했지요. 하체 밸런스 훈련요. 흔들리는 버스 중간에 서서 버티는 거지요. 그러면 버스기사는 백미러로 저를 미친놈 보듯 힐끔거렸습니다."

생활 속에서 야구를 독학하던 김성근은 방학 때 막노동판에서 야구를 깨친다.

"삽으로 흙을 떠서 높은 곳으로 던지는 작업이었습니다. 처음엔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무릎 반동을 이용해 봤죠. 힘이 덜 들면서 흙이 가뿐하게 날아가더라고요. 무릎을 쳤죠. '아! 이게 야구다. 무릎이다.' 돈이 있어 막노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야구를 깨치지 못했을 테고, 지금 이 자리에도 없었을 겁니다."

 ▶부러진 방망이

우유배달 해서 받는 돈은 월 9000엔. 나무방망이 하나에 7000엔. 새 공조차 구경 못하던 시절 큰 맘 먹고 나무방망이를 샀다.

"매일 기름칠하고 소뼈로 문질렀어요. 그러면 나무를 포개 붙인 부분이 단단해졌거든요."

대문에다 아홉 개의 마크를 그려놓고 밤마다 미친 듯이 휘둘렀다. 한데 그 즐거움도 얼마 가지 못했다. 연습 도중 바람에 넘어지는 대문을 때려 방망이가 부러지고 만 것이다. "7전 8기란 말 있잖아요. 저는 7전 8전이었어요. 끝없이 쓰러졌어요. 허허허."

나중엔 동네 목욕탕을 훈련장으로 썼다. 탕에 들어가 쪼그려 앉은 채 무릎 사이에 팔을 끼워 고정한 뒤 공 던지는 동작을 반복했다. 1000개씩. 물의 저항을 이용한 손목 운동이었다. 이어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채 주먹 쥐었다 폈다를 역시 1000개.

뜨거운 탕 속에서 벌이는 얄궂은 짓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그나마도 목욕비 12엔이 없어 맘 놓고 가지도 못했다.

 ▶준비하라, 기회는 온다

고3 때 기회가 왔다. 머릿수 채우려고 경기에 나갔다가 '재일교포 야구팀'에 뽑혀 한국땅을 밟았다. "파고다호텔에서 난생처음 오므라이스라는 걸 먹고 맛있어서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콜라도 처음 마셔봤는데 취해서 혼이 났어요."

참 많이도 굶고 살았다. 최고의 음식을 카레라이스로 기억할 정도다. 그것도 고기 살 돈이 없어 소 힘줄을 넣어 만든 카레라이스.

먹지도 못한 채 하루 서너 시간을 자며 몸부림친 학창시절. 죽을 힘을 다해 버틴 결과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모국방문 친선경기 14승2무.

강둑에서, 버스에서, 철길에서, 막노동판에서 하나하나 다진 '카네바야시 야구'는 이미 엄청난 무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 '김성근 야구'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식은밥 먹는 법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인생의 성패가 갈리지요."

김 감독은 선수를 함부로 자르지 않는다. 0.1%의 가능성만 있어도 집요하게 파고든다.

코치들이 올린 자료만으로는 선수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다. "코치들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자료만 가지고 선수를 잘라버리면 너무 불쌍하잖아요. 그들에게는 인생 전부인데. 사람 하나 잘못 만난 죄로 인생을 버리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보고 또 보고, 다시 가르치고 다듬어 건진 선수가 여럿이다. 자기 또한 방망이도 없이 늘 벼랑 끝을 걸으며 살아온 인생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