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마음

냉면

이예경 2009. 6. 10. 23:50

< 함흥 냉면 >

 

이예경

 

후덥지근한 장마더위에는 입맛을 잃기 십상이다. 파킨슨병으로 오 년째 투병 중이신 아버지께서 말씀 중에 옛날에 드시던 함흥 냉면 생각이 난다고 하셔서 우리까지 덩달아 침이 고였다. 우리는 소뿔을 단김에 뺄 것 같이 충동적으로 일어나 집을 나섰다. 거동 불편으로 외출을 즐기지 않으시는 아버님께서도 선뜻 승낙하시니 다행이다

시간이 오후 한 시면 피크타임은 아닌 거 같은데 냉면집 앞에는 기다리는 손님들로 장사진을 치고 있어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인네가 보행기를 의지하고 서계신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냉면집 사장이 달려와 자리를 곧 마련해주겠다고 하였다. 호의에 너무나 고맙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몇 해 만인가 모르겠다. 냉면이 오자 한입에 바로 그 옛 맛이 살아나고 잠시 조용하다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다른 냉면집에선 왜 이 맛을 못 내는지 몰라. 참 맛있지?" 어머니의 말씀이다. 입맛이 없다시던 아버지께서는 오물오물 씹으시며 옆도 안보시고 열심히 드신다. 모시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육수를 마시며 어머니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이거 봐라. 보통은 다시다 국물이던데, 이건 집 간장으로 맛을 냈구나. 개운하지?"

". 정말 그렇네요. 짭짭" 모두들 식사에 열중하여 긴말이 필요 없다.

"담에 한번 더 오자." 국수그릇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못내 아쉬워서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다.

나는 식사 후에야 주위를 둘러보니 손님들 대부분이 연세가 드신 분들이다. 식사하는 사람들 얼굴엔 "만족"이라고 써있다. 식욕이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이 찜통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냉면 한가락 잡수시려고 먼데서 온 분들이지 싶다. 우리를 포함, 지팡이 짚은 노인들도 몇 분이나 눈에 뜨이고 늦은 점심 시간인데도 문밖에는 아직도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고향이 함흥인 어머니께서는 워낙 냉면을 좋아하셨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시장보고 나면 짐 보따리를 들고서 쉬기도 하고 허기도 면할 겸 툭하면 이 함흥냉면집에 들렸었다. 한 고향이던 어머니 친구들 계 모임도 항상 그 냉면집이라서 불참 시에는 어머니의 곗돈 심부름으로 가본 적도 있다. 그러다 대학시절 메이데이 날에는 행사가 끝나고 과 친구들이랑 버스 타고 함흥냉면집으로 직행, 땀 뻘뻘 흘리며 물 들이키며 참 맛있게도 먹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가끔은 일부러 냉면 만을 위하여 이 집을 찾기도 한다. 어쩌다 불현듯 눈앞에 냉면 그림이 떠오를 때면 입안에 침이 고이고 쫄깃한 면발에 새빨간 회 무침이 입안에 들어간다. 씹으면 살캉한 맛, 화끈하면서 왠지 시원한 그 맛을 느끼며 다시 흥건하게 침이 고이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입덧하는 새댁처럼 그냥 일어나 그 냉면집을 향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이 되고 만다. 추운 겨울에 빙수 물같은 동치미 국물에 오들오들 떨면서 먹는 냉면 맛도 더할 수 없는 별미다

식사가 끝나고 일어섰는데 아버지가 다리 힘이 없어서 내가 일으켜드리는 거로는 해결이 안 된다. 힘들어하자 식당 주인이 달려와 아버지 겨드랑이를 자기 어깨로 받쳐주며 허리를 껴안고 하낫둘 하낫둘 장단 맞추며 택시까지 모셔다 주었다. 냉면도 잘 먹었는데 친절까지 끝내준다. 택시 기사도 아버지의 느린 걸음을 잠시나마 기다려주니 미안하고 고마웠다

식당주인은 생계를 위해 일하기도 하겠지만 나를 포함 내 부모님 입맛을 만족시켜주니 참 고맙다. 생면부지의 이 손님들 모두에게도 잠시나마 행복을 안겨주고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려고 평생을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룬 결과로 남을 행복하게 해주니 자신도 따라서 행복해졌을 것이다. 기쁨은 남에게 기쁨을 주는 자 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던 말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딸들 덕에 아버지께서 입맛을 되찾으신 것 같다고 웃음이 가득이시다. 거동이 불편하신 환자를 모시고 있으니 남의 도움이 필요한 적이 많은데 낯 모르는 주위사람들까지 너무나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맙다고 한다. 딸만 여섯을 낳고 사는 동안 평생을 아들을 그리워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아들이 그립지 않다고 하신다. 나이 들어 부부가 교대로 병원에 입원했을 적에도 주위에서도 아들만 여섯이었다면 며느리들이 그렇게 살갑게 보살펴 주겠느냐고 모두 부러워하더란다. 아버지 병구완으로 어머니께서 고생하시면서도 이렇게 좋은 말씀을 해주시니 너무 고마워서 어머니 사랑해요 소리가 절로 나온다.

환자들이 뭣 잡숫고 싶다 하셔도 막상 모시고 가면 한 두 젓가락 이상은 못 잡숫더라 하던데 그런 중에도 잘 잡수신 아버지가 고맙고도 대견하다는 생각. 맛있게 드실 수 있으니 거동 불편쯤이야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입맛은 우리가 대신해줄 수 없지만 거동 불편은 우리가 도울 수 있으니 말이다.

귀가길 발걸음이 가볍고도 무겁다. 아버님이 흐뭇한 표정으로 냉면을 오물오물 맛있게 드시던 모습이 떠오르면 가볍지만, 한편으로는 나날이 노환이 깊어가는 모습이 느껴지는 때문이다. 그래도 이나마 모시고 다닐 수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번 더 냉면집에 모시고 갈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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