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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암사의 역사와 유래

이예경 2016. 3. 20. 13:45

세속에 찌든 마음 내려 놓으라 하는 고색창연한 절집인 태고총림(太古叢林)으로

선암사는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天台宗) 발상지 


 호남의 명산 전남 순천 조계산(884m) 동 서 양쪽에 있는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송광사 선암사 양대종찰이 있다.

그 중에 서쪽의 선암사는 한국적인 절의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한 천년의 고찰이자

많은 선승을 배출한 태고종의 본산으로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한 천태종의 발원지로

무지개 모양의 승선교(보물 제400)등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선암사는 조계종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진 태고종(1)의 총본산이다.

선암사는 한국 절집의 옛 모습을 가잘 잘 보존하고 있어서

마치 산사의 모범답안같이 청정하고 아름다운데 그중에서도 특히 봄이 가장 아름답다.

갓 부화한 물고기의 여린 몸뚱이처럼 야들야들한 신록으로 조계산이 물들기 시작하면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절 곳곳에는 벚꽃이며 목련·모란·앵두·모과·철쭉·영산홍·동백·상사화·옥잠화·치자·파초·부용 등

갖가지 화초와 꽃나무가 잇달아 피어나 화훼전시장인 양 그 빛깔과 모습들의 다채로움을 자랑하는데,

고풍이 흐르는 전각들과 어울린 분위기는 화려하기보단

갓 시집 온 새악시 볼에 번지는 연분홍색 부끄럼처럼 조신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고려 중기 선암사의 모습은

적막한 산골 속에 자리한 엄숙한 예배처였다.

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의 중일세. 마음속 티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지혜의 물은 맑고 용하기도 하네라고 읊은 고려 명종 때의 문신 김극기(金克己)의 시구처럼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선암사는 이러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920년대의 선암사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건물이 피해를 보고 소실되는 등

상처를 겪었지만 선암사는 아직도 한 세기 전의 옛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절이다.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802번지(승주읍 선암사길 460)에 있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천년 고찰선암사는 통일신라 말기

도선이 호남을 비보하는 3대 사찰인 3(2)의 하나로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성왕 7(529)에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

도선이 재건하였다는 두 가지 창건설화가 전해온다.

 

선암사 중수비육창건기등 선암사 사적기(仙巖寺寺蹟記)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3(542) 아도(阿道) 화상이 현재의 비로암(毘盧庵) 터에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를 창건한 것이 시초이고,

그 후 신라 말 경문왕 원년(861) 풍수지리를 처음 전파한 스님으로 알려진

한국 토착풍수의 비조라는 전라도 영암출신인 선각국사 도선

(先覺國師 道詵: 827~ 898)이 중창하면서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 하고

구산선문 가운데 동리산문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고 한다.

도선 국사는 조계산 서쪽에 신선이 바둑을 두는 바위(仙巖)’가 있다며

비로암을 선암사로 고쳐 이 절을 부흥시켰다고 한다.


이후 고려 중기인 고려 선종 9(1092)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

이곳 대각암에서 수도하면서 산 이름을 조계산이라 하고 사원을 크게 중창함과 아울러

고려불교의 여러사상을 선()과 교))로 융합하여 겸수토록 함으로서 선암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 출가한 뒤 국내외 여러 종파의 불교사상을 두루 익힌 후

중국에서 천태종을 전수받아 1092년 선암사에서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선암사를 중창할 때 의천은 대각암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종이 의천에게 하사한 금란가사, 대각국사 영정, 의천의 부도로 전하는 대각암 부도가

선암사에 전해오고 있어 이를 반증하고 있다.


*()2, 비보 3():

도선이 세운 세 암자는 광양 백계산 운암사, 순천 조계산 선암사, 영암 월출산 용암사를 말한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선암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은 불교 개혁의 산실이 된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송광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이 기존의 타락한 불교계를 비판하며

정혜쌍수를 내세우는 개혁불교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이웃한 선암사가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지는 관련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송광사가 사세를 떨침에 따라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성리학을 정치·교육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 왕조가 억불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조선 전기는

사찰들이 대단히 어려웠던 시기로 선암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 선조 30(1597) 정유재란으로 대부분의 사찰이 그러하듯 불에 타서

거의 폐사로 방치된 것을 100여년이 지난 숙종 24(1698) 호암 약휴(護岩 若休; 1664~1738)대사(3)

크게 중건했는데, 당시 선암사는 교학의 연원이라 할 만큼 교학이 융성하였다.

 

이후에도 선암사는 크고 작은 화재를 만나 여러 차례 중창 불사되었다.

영조 35(1759) 봄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계특 대사는 빈번한 화재의 원인이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선암사의 지세(地勢) 때문이라 하여

화재 예방을 위해 영조 37(1761)에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으로, 절 이름을 해천사(海泉寺)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순조 23(1823) 또다시 불이 나자

해붕(海鵬눌암(訥庵), 익종 스님이 대대적으로 중창불사를 불사를 하였으며,

이후 옛모습을 되찾아 산과 절 이름을 조계산과 선암사로 되돌렸다고 한다.


그 흔적이 일주문에 남아 있는데, 들어갈 때 보이는 현판은 조계산 선암사이지만,

나갈 때 보이는 현판에는 청량산 해천사라고 새겨있는 것이다.


 현존하는 선암사의 건물 대부분은 이때 지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전각 60여 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여순사건과 19506.25 한국전쟁의 피해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고

지금은 20여 당우(堂宇)만이 남아 있지만, 그전에는

불각(佛閣) 9, () 25, 누문(樓門) 31동으로 도합 65동의 대가람이었다.

 

특히 이 절은 선종(禪宗교종(敎宗) 양파의 대표적 가람으로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松廣寺)와 쌍벽을 이루었던 수련도량(修鍊道場)으로 유명하였다.


경내에는 보물제400호인 승선교, 보물 제1311호 인 대웅전,

보물 제395호인 대웅전 앞의 두 개의 삼층석탑, 보물 제1044호인 조사당의 대각국사 진영,

보물 제1117호인 대각암부도, 보물 제1184호인 북부도, 보물 제1185호인 동부도,

천연기념물인 선암사 홍매(선암매) 등 다수의 중요문화재와 기념물 등이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며, 선암사는 20091221일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다.


*()3, 호암대사 약휴(1664~1738) :

호암대사 약휴는 12세에 선암사로 출가하여 숙종 24(1698)부터 8년 동안

선암사를 중창하고 불상과 탱화를 조성했다. 선암사 입구의 승선교도 그가 조성한 것이다.

선암사 중창 불사에 부지런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당호도 선암사를 보호하라는 호암’(護岩)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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