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을 닮은 강화 성공회 성당
강화도에 가면 우리 절을 닮은 성당이 하나 있다. 성공회 강화 성당이 바로 그것이다. 성공회 성당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이 성당은 종교의 전파와 관련한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제공해 준다.
어떤 종교든지 다른 지역에 처음 전해질 때에는 그 지역의 문화적 전통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문화 전통을 고집할 것인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천주교가 중국에 처음 전파될 때에 신부들이 승려의 복장을 하고 포교하였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는 모습은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나 백제처럼 왕실이 중심이 되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경우는 별다른 문제점이 없었지만, 원시 신앙의 전통이 강했던 신라의 경우는 머리를 깍은 승려의 모습이나 복장이 강한 저항의 한 요인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 전파된 천주교는 조선의 전통적인 제사 의식 등을 부정했기때문에 극심한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서양 여러 나라와 수교를 함에 따라 탄압이 없는 상태에서 새로 들어온 종교가 개신교와 성공회이다.
영국 왕 헨리 8세의 이혼문제를 둘러싸고 카톨릭 교황청과 갈등을 빚으면서 설립된 성공회는 영국의 국교로 출발했다. 성공회는 영국뿐만 아니라 지금은 세계로 전파되어 각 나라별로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지역 교회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 개혁 시기에 성립된 성공회는 구교와 신교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여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로마교회와 그리스정교회의 분열 이전의 초대교회의 신앙을 지키려 하는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성공회는 우리나라에는 1890년 영국에서 온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선교 초기부터 우리 문화에 뿌리를 내린 교회가 되고자 토착화에 힘썼다.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이 자기 문화의 우월성을 내세워 우리 문화를 경시하거나, 불교와 같은 우리 전통 신앙을 배타적으로 대한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발행한 「조선크리스트인회보」란 잡지에는, 절에 대해 '지옥에 갈 자들이 지옥에 간 자들을 섬기는 곳'이라 하고, 나아가 불상은 '우상이니 섬기면 점점 더 죄를 짓게 된다'며, '지옥은 곳 절이요, 죄는 곳 부처라'고 하여 노골적으로 배타성을 드러낼 정도였다.
성공회 선교사들의 생각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상대적으로 우리 문화를 존중한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성당도 우리 건축 양식으로 짓게 되는데, 지금도 우리 건축 양식의 성당들이 강화, 진천, 청주 등에 남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00년에 세워진 '성공회 강화 성당'이다.
성당의 정문은 솟을삼문으로 양옆에는 태극무늬까지 들어있다. 성당 건물은 십자가를 제외하면 우리 전통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절인지 착각할 정도이다. 종각과 범종이 있는 것도 그러하며 건물 중앙에 현판을 내건 것, 기둥에 글씨를 써서 내건 것 등이 영락없는 우리 전통 절과 다름이 없다. 더구나 건물 밖에는 불교와 인연이 많은 보리수를 심어놓아 절의 분위기가 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건축의 경우는 양옆으로 긴 건물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성당 건물은 팔작지붕의 합각부가 정면이어서 앞뒤로 긴 건축물이 된 점이다. 이는 서양 건축과 우리 건축의 서로 다른 점 중의 하나이다. 성당 내부는 기독교 건축의 특성대로 지어졌다. 즉 이 건물은 우리 전통 건축의 겉모습을 하고 내부는 기독교 건축 양식을 따른 것으로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강화 성당은 초기 성공회 신부들의 토착화 의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사진1609> 강화 성공회 성당 전경. 성당 건물은 십자가를 제외하면 우리 전통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 절인지 착각할 정도이다. 종각과 범종이 있는 것도 그러하며 건물 중앙에 현판을 내건 것, 기둥에 글씨를 써서 내건 것 등이 영락없는 우리 전통 절과 다름이 없다. 더구나 건물 밖에는 불교와 인연이 많은 보리수를 심어놓아 절의 분위기가 짙어 흥미롭다.
<사진1610> 강화 성공회 성당 세부. 천주성전이란 현판과 십자가는 이곳이 성당임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