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국수속 시 보스니아 국경을 넘을때 시간이 좀 걸렸다
까다롭게 해서라기 보다는 느릿느릿 바쁠게 없는 사람들로 보였다
국경지역 관할 사무소의 직원들 인상이 각박하게 보였다
국경을 넘어서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깨끗한 주택가가 나타났다 좀 사는 동네인가보다
보스니아는 이슬람 문화권이며 산지가 국토의 97%라 높은 산들로 이루어져 목축업으로 살고 있다
원래 이름은 보스니아 헤르 체코비나이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양의 분쟁, 기독교와 모슬렘 그리스정교로 인한 분쟁의 중심지역이었다. 전쟁 전의 사라예보는 100년 동안 다인종-크로아티안,세르비안, 터키쉬,유대인,이슬람-들이 평화공존 하였으나, 내란 분쟁 후 모든 경제기반이 무너져 수백만명의 피난민이 생겼다.
성모마리아의 발현으로 메주고리에 7명 아이들이 발견, 세계의 성지순례자가 모인다
GNP가 1인당 1463불, 다민족 다종교 사회로 문화 전통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통일된 국민성을 찾기 어렵다
내전에서 각 계파간 인종청소를 자행...결국 서로간의 거주지가 구별되고 갈등이 많다
길가의 집들이 편안하게 보인다
길목의 밭들도 노는 땅이 별로 보이지 않고 푸르르다
멀리 보이는 산들은 율리안 알프스 산맥으로 해발 2900미터이다
산길을 지나다보면 소떼 양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이곳 사람들은 집을 꼭대기에 주로 짓는것 같다 한국으로 치면 달동에 위치인데 여긴 반대인지?
주택가 한가운데로 묘지가 있다. 일본 대마도에 갔을때는 절이 주택가 한가운데 있고 절안에 묘지가 있었는데 여기도 종교만 다를뿐 조상을 모시는 장소는 비슷한거 같다...더 가까우면 더 자주 가니 좋을까?
집 한가운데의 묘지는 밀로셰비치의 인종청소때에 무작위적이고 무제한적으로 산을 향해 저격하는 세르비아계와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을 기억하고자 마을 한가운데에 세운 것이라고 들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잊혀 지지 않는 풍경은 전쟁의 상처를 그대로 껴안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의 풍경이었다. 가운데 내륙 평지를 뺑 둘러싼 산들 위에 조그만 집들이 빼곡한 동화처럼 아름다운 도시 사라예보에 들어서면서 나는 아직도 총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무장군인들이 산 위를 모두 점령하고 꼼짝없이 포위된 산 아래 평지에 사는 민간인 회교도들을 향해 허구한 날 총을 쏘아대고 폭격을 일삼는 것이 내전 4년 동안의 보스니아인들의 일상이었다.
십 년 전의 전쟁의 추억에 관해 사라예보의 젊은이들에게 물으면 밝은 얼굴로 답한다. 그 때도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고 폭격 소리가 들리면 숨어 있다가 집으로 갔단다.
이런 다리가 모양다르게 상당히 많이 연결되어있다
옛 유고 연방의 중심인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한국 음식을 먹으며 감회가 새로웠다. 이곳으로 이민을 왔다는 음식점 주인은 1992년 전쟁 당시 한국에서 유고슬라비아어를 전공한 젊은이였다. 이차 대전 시 독일로부터 유고의 독립을 쟁취한 뒤, 구소련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독립적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영웅 ‘티토’를 사모했던 한국의 젊은이를 상상해보라. 그는 전쟁 시 베오그라드는 그렇게 전쟁의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가끔 멀리서 총 소리가 들리는 일상화된 전쟁 속에서, 차라리 두고 온 한국이 더 걱정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여섯 개의 공화국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티토 사망이후 심각한 경제 위기에 처하게 된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두 공화국이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한데 이어 1991년 보스니아도 독립을 선언한다. 이 때 독립을 반대하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무장군인들이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무차별 살상의 지옥 전쟁을 벌인 것이 보스니아 내전이다.
새파란색 시내 버스에 그려진 그림을 보세요... 세계 멋진 곳은 다 그려져있네요... 버스고 길고 크고...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이슬람 사원이네요 이슬람 사원에 여자는 출입이 금지되 있어서
밖 담벼락에다 절을 한다네요 남존여비 사상이 심한가봐요
미라보 다리 아래 우리들의 사랑은 흐른다...더니....
이렇게 무심하게 보이는 다리가 세계 대전의 불씨가 된 사건의 문제 다리입니다
1914년6월 28일 오스트리아 프란츠 페르디난도 대공과 그 부인이 암살당랬던 그 다리랍니다
황태자가 이 거리를 지날때 폭탄테러를 당했는데 황태자는 불발 폭탄을 받아 무사했으나
그 현장에서 인민들이 많이 부상당했다 황태자부부는 이에 측은지심이 생겨 늦은 저녁에
병원방문을 생각하게 되었고 운전기사는 병원을 찾다가 길을 헤메어 이 다리를 지나게 된다
그러다가 어처구니 없게도 테러범을 만나 총살당하고 말았다
1863 12.18 요셒1세의 아들인 프란츠는 오스트리아 항가리 제국 황제의 후계자였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8월2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합스부르크 가는 연합군의 참여로 전쟁 참패 후 오스트리아 영토는 분열되었다
사라예보 뒷길 길가 카페...우리와 다른 건 뭐든지....무조건 찰칵!
이런 주전자와 컾에 찐한 커피를 따라 마신다
이슬람 대학원을 방문하였는데 마침 바자에 학생 작품들이 많아서 쇼핑 겸 구경을 하였다
대개 이슬람은 이슬람끼리 모여 살면서 학교나 사원이 가까이 있는데 이슬람 마을의 경우 현관마다 포도나무를 심어 그늘도 이루고 탐스런 열매도 있고 보기 좋았다
전쟁 상이용사 추모 비석과 꺼지지 않는 불꽃...추모하는 마음도 꺼지지 않을 거에요
누군가의 ‘고통의 상품화’라는 말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관통하는 말이라면, 사라예보에서도 우리는 전쟁의 상처들로 얼룩진 고통들을 관광이라는 상품에 덤으로 얹어 구경하는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딘들 그렇지 않으랴. 세월이 지나면 그 어떤 상처도 추억이라는 내용의 상품이 된다. 아우슈비츠가 그렇고, 보스니아가 그렇고, 우리의 비무장지대가 그렇다. 어쩌면 비무장지대는 서구인들에 마지막 남은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보스니아 내란은 한 국가 울타리에 살던 사람들이 각 민족의 이익을 내세우며 동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오랜 세월 키워온 불합리한 증오심의 무분별한 폭발이었다.
보스니아를 떠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들과 마주하면서도, 여행 내내 나는 사라예보의 상처어린 풍경들이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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