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돌아와보니
집안은 먼지가 뽀오얗고, 빨래통이 그득하고 과일도 야채도 거의 안남았고 밑반찬도 거의 동이났고.....억망이다. 가기전에 대청소해놓고 빨래통을 쏟아 해결하고 과일 야채랑 밑반찬을 잔뜩 해서 냉장고를 채워놓고 했던것인데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은 모르는 식구들 같으니라고...아니 엄마가 올 때되면 뭔가 신경좀 써야되는거 아닌감?내가 집에서 소중한 엄마가 아니고 하녀였나보다...
내가 진이 좀 빠졌는지 일하기도 싫고 기운이 없고 짜증이 난다. 집안은 집안대로 사무실은 사무실대로 밀린 일들 뿐이라 해결이 시급한데 하루종일 졸립다. 그래서 여기 앉고 싶었지만 생각 뿐이었다
지금 시각 12시 52분 한밤중이다 하도 졸려서 낮에 커피를 두잔 마셨더니 역시 효과가 좋다 수면부족으로 낼아침에 좀 헤매겠지만 ....
15일저녁에는 완이가 기주를 데리고 공항에 마중나와주었고 윤경이가 저녁밥을 해주어서 덕분에 편하게 지냈다
귀국 다음날 12월 16일에는 엄마와 아버지 회혼식 날이었다. 회혼식을 올림픽공원 건너편에 있는 중식당 <어양>에서 아버지 엄마 컨니 완이 김서방5 윤기 지연 성희 와 3공주가 모여 만찬을 했다 부부가 60년을 해로했다는 사실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부부가 싸울때는 나만 짝을 잘 못 고른 것 같고 남들은 안 그래 보이지만 통계적으로 아주 잘 어울리는 부부는 고작 0.03% 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부부는 맞지도 않는 사람들이 만나 티각태각하며 살게 마련인 것이다 날이 갈수록 자꾸만 얼키고 설켜서, 헤어지는 것이 사는 것 보다 더 어려워진다고도 한다 결혼은 참을성 테스트 같기도 하다 하여간에 우리 부모님께서는 어떤 테스트이건 간에 다 합격하셨다 큰- 축하를 해드리자
아침에 6시에 떠날 계획이었으나 6시 40분에야 롯데백화점 앞에서 버스를 탔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7시 30분인데 비행기는 9시 40분 출발이다. 짐을 부친 후에 인민폐로 환전을 했고 아버지는 장애자용 휠체어 서비스를 받기로 하여 일정장소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엄마와 컨니는 줄을섰다. 근데 10시에 연길에 가는 비행기와 손님이 겹쳐서 혼잡하기 이를데 없고 무척 오래 기다리다가 14번 출구를 향해 들어서니 9시 25분이다. 가는 길목에 여승무원 하나가 "장춘가는 분-" 하고 소리를 치고 있어서 엄마가 그냥가자는걸 우겨서 가까이 가보니 이에경 김연희씨냐고 하며 빨리 비행기로 가보라고 한다 마음이 바빠서 달려가보니 아버지께서 왜 이제 오느냐고 틀림없이 사고가 난 줄 알았다하신다
아버지는 승무원에게 만약 이예경과 김연희가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당장 자신도 내리겠으니 찾아오라고 하셨단다. 내뒤에 두 명이 더 타고서 금방 이륙을 했다. 나는 여권이니 돈가방을 책임지고 있어서 어깨에 메고 손으로 꼭 붙잡고 내내 가방에 신경이 쓰였다. 촌스러워도 할 수 없다. 아버지는 오줌통을 가리키며 "이걸 쓰던 안쓰던 나는 이게 옆에 있어야 맘이 편하다"고 하셨다. 비행기엔 온통 얼굴 누-런 동양인뿐이다. 아시아나 항공인데 승무원들이 매우 친절해서 더 이쁘게 느껴졌다.
장춘에 내려서도 아버지는 휠체어서비스를 받았으므로 또 우리와 헤어져 따로 공항으로 들어와 만났다. 역시 기온이 좀 차가왔는데 공항 실내에 들어서니 원 시커먼 이불인지 요인지가 커텐같이 문을 가리고 있다. 아마 찬바람을 막으려고 문에 친 것인가 보다. 공항직원이 중국말로 뭐라하더니 빨간 불이 켜진 총을 내 이마에 대고 쏜다. 싸스 때문에 뭔 검사를 하나보다. 밖에는 웬 아줌마가 아버지를 보더니 자기가 마중을 나왔다며 짐을 들고 앞장을 서서 승용차에 타라고 안내를 했다
장백까지는 8시간 걸리며 거긴 더 춥다고 한다 "르망"보다도 작아보이는 차 뒷자리에 여자셋이 앉고 아버지는 앞자리에 앉았다. 초면인데 끼어 앉아있으려니 뭔가 말조심도 해얄것 같고 분위기가 썰렁했다. 엄마가 느닷없이 장백아줌마에게 말했다. "여긴 날이 춥네요. 그래서 이 코트를 빌려 입고 왔어요" 엄마 코트는 목에 검정밍크털이 달렸고 좀 고급이라 뭔가 바가지를 쓸 일이 생길까봐 미리 분위기를 잡으시나보다. 아버지는 운전수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신다. 세계정세니 미국과 중국의 관계니 뭐 그런건데 엄마는 아버지가 경계심도 없이 별얘기를 다 하신다며 조바심을 보였다. 내겐 엄마가 좀 과민하다 싶었지만 앞길을 모르니 미리 조심은 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장백아줌마는 새벽두시에 일어나 3시경에 차를 탔다면서 졸립다고 했다. 운전수는 그때부터 계속 16시간을 달리는 셈이다
장춘시를 벗어나니 고속도로, 그 뒤로는 주로 산길이다. 가끔 시골 읍 같은 것이 보이지만 4시간이 지나 고 중간 정도에서 백두산 가까이 가니 어두운 밤인데 계속 가도가도 첩첩 산길이다. 여우고개 같은 곳도 나오고 산이 깊어지니 호랑이가 나올 것 같다. 이렇게 가다가 갑자기 이 사람들이 차를 세우고 "있는 돈 다 내놓아라"하면서 돈을 뺏고 아무데나 우리를 버리면 우리는 그냥 얼어죽게 생겼다. 그렇다고 그걸 누가 알 것인가...쓸데없이 공상을 하니 잠도 안 오고 말똥말똥 눈을 뜨고 편치 않은 마음으로 컴컴한 창밖을 응시하며 달리고 달린다.
장백아줌마한테 가끔 핸드폰이 울린다. 삼성 핸드폰이다. 어디만큼 왔냐고 빨리 오라고 한다. 톨게이트를 12개도 더 지났다. 깜빡 졸았는지 곧 장백이라고 한다. 시내로 들어서고 주택가 골목길에 들어서더니 차가 멈추었다. 길고 긴 여정이었다. 이제 현관문이 열리면 고모를 보게 될 것이다.
현관문을 여니 비행장 건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안쪽에 두꺼운 이불이 드리워져 있다.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며 눈앞이 흐려진다. 안경이 습기로 뿌옇게 되서다. 아버지를 뒤따라 들어가니 "경자야" "오빠" 하면서 두 분이 마주보고 섰는데, 아버지의 얼굴이 애써 웃으려다가 구겨지고 눈에 물기가 서린다. 엄마는 울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더니 어쩔 수가 없나보다.
고모는 아버지 손을 붙잡고 방으로 이끈다. 방과 부뚜막 사이엔 벽이 없이 터져 있다. 방은 부뚜막 보다도 높은데 군불을 땠는지 절절 끓었다. 할 얘기가 서로 많으니 연신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나는 옆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내 머리 속에 녹음기를 돌린다.
첫눈에는 고모얼굴이 낯설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니까 고모얼굴 속에 할머니의 얼굴이 들어있고 아버지의 얼굴이 들어있고 목소리는 복경이와 거의 똑같다. 그리고 보연이의 말투와 보연이의 표정이 들어있다. 친척이라는 걸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을 것 같다. 내 눈에도 그렇게 느껴지니 공항에서 장춘아줌마가 아버지를 보자마자 고모와 똑같애서 망서림 없이 다가왔다고 한 것이 이해된다.
고모의 외모는 얼굴에 굵은 주름살이 많고 짧은 파마 머리에 가무잡잡한 모습이었으나 키가 늘씬하고 체격이 좋으며 손발이 큰 편이고 건강한 모습이다. 어릴 적에는 갸름한 모습에 꽤 예뻤다고 한다. 말씨가 고상하고 사건의 전말을 얘기할 때는 자기 주관을 잘 표현하며 긍정적 방향으로 이야기했다. 남을 배려하는 따스한 마음이 느껴졌다. 성격도 아버지와 비슷한 점이 자주자주 느껴졌다.
10일 저녁 8시에 장춘아줌마네서 만나 저녁을 먹고 새벽 두시가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을 청했다. 누워서도 간간이 이야기가 오갔다. 다들 흥분과 피곤으로 잠이 오지 않나보다. 고모, 아버지, 엄마, 컨니 순으로 누웠다. 고모는 연신 "나 같은 사람을 보려고 그 먼데서 그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왔소" 하면서 감격한 듯 되뇐다. 아버지 잠결에 고모가 아버지 손을 꼭- 잡는 게 느껴지더라 하신다.
사진으로 보던 오빠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면서 이렇게 불편한 몸인줄 몰랐다고 한다. 옛날에 그렇게 미남이던 오빠가 이렇게 팔십 노인으로 변했다며 울먹거렸다. 자기들이 도움을 주어야 할 형편인데 도리어 만나러 오라는 둥 뭘 보내달라는 둥 당치않은 부탁을 했다며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면서 미안해 한다.
화장실이 바깥의 마당 끝에 있으므로 부엌 한쪽에 오강 대신 바께스를 놓아두었다. 변소는 널판지로 얼기설기 엮어놓아 일보는 사람이 다 보이고 아주 옛날 식으로 냄새 고약하고 발이 빠질 것 같고 오물이 고스란이 보인다. 아버지는 하루 밤을 지내시더니 도저히 못 있겠다며 호텔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호텔에는 고모가 갈 수 없다고 외출을 안하는게 안전하다고 장춘 아줌마가 말하므로 그냥 머물 수밖에 없었다.
11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12일 온종일 우리는 계속 같은 자리에 앉아서 밥먹고 얘기하고 밥먹고 얘기하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고모는 14세에 아버지와 헤어진 후 학교는 초급대학까지 다녔고 노처녀로 직장생활을 하다가 늦게서야 노총각을 만났다고 한다. 지주들의 수난시대라 할머니가 수용소로 갔을 때니 결혼 때 어렵게 지냈다고 한다. 평생 아버지는 유복자 어린동생을 잘 거둬주지 못해 마음이 쓰이던 중 그 얘기를 듣더니 매우 가슴아파 하셨다.
친척 친구 사촌 등의 이름을 대며 하나하나 소식을 물었고 그렇게 해서 지나간 오십여년의 진도를 서로 조정해 나간다. 토지가 오십정보 이상인 지주들은 가차없이 수용소로 보냈다고 하는데 할머니도 7년간 수용소생활을 하다가 풀려나와 아들네랑 좀 살다가 여생을 마치셨다 한다. 여기도 아버지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대목이다. 피붙이들이 다 고생하고 살았으니 들리는 소식마다 가슴을 다 아프게 한다.
한국을 떠난 후 게속 좁은 공간에 앉아만 있었고 장백에 와서도 이틀이나 좁은 온돌방에 종일토록 쪼그리고 앉아 이야기에만 열중하고 있다보니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나려면 나는 오금이 당기고 우드둑 소리가 나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고모도 놀고 먹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줄 몰랐다며 감옥살이 같다고 한다. 아버지와 엄마도 컨디션이 형편없었고 특히 아버지는 화장실에 갔다가 큰일을 본 후 오금이 펴지지 않아 일어나시지를 못하여 엄마가 결사적으로 끌어당기는 둥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래서 저녁에 나는 한분씩 카이로프락틱이니 지압이니 해드리느라고 녹초가 되었는데 새벽녘 잠결에 아버지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다. 일초에 한번씩 숨가쁘게 호흡을 하시고 있었다 나는 잠이 벌떡 깨어 아버지를 붙잡고 손 맛사지 가슴 맛사지를 하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팔굼치로 나를 밀친다. 나는 놀래서 아버지를 흔들며 무슨 꿈을 꾸셨느냐고 물으니 커다란 짐승이 덮쳤다고 하신다. 아! 어두운 세력의 공격이구나! 나는 어두운 세력을 물리치는 기도를 했다. 아버지는 어느새 숨소리가 고르게 평화로워 지셨다. 발까지 지압을 해드리고 나는 자리에 들었다.
그러다가 나는 잠이 들었는데 다시 아버지의 가쁜 숨소리에 잠이 또 깨었다. 나는 너무 녹초가 되어서 이번에는 일어나지 않고 내자리에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기도를 간절하게 하였다. 기도 응답이 왔다. 얼마 후 아버지의 숨소리가 차분해진 후 다시 눈을 붙였다. 영적인 전투의 경험이다.
아버지가 마음이 허해지신 것 같다. 마음이 조금만 허해지면 공격을 받게 된다. 고모랑 얘기 중에 뭔가 마음에 상처가 된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아버지께 무슨 꿈이었나 물었더니 노인들은 자주 그런 꿈을 꾼다며 친구들도 마찬가지더라고 하신다. 친구들이 신앙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셰례도 받으신 몸, 명령기도를 하면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것을 괜히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방법을 알려드렸더니 이젠 기도를 해보겠다고 하셨다.
고모에게도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았으며 기도생활을 한다고 나의 간증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고모를 만나기를 기도했고, 고모가 신우염을 앓을 때도 빨리 낫기를 기도했고,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생길때 기도를 한다. 모두 응답을 받았고 가마한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얘기하였다. 결국 고모에게서도 기도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48시간의 상봉시간이 어느덧 흘러가 버렸다. 이제는 떠나보낼 시간이다.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좀 황당했던 일이라면 헤어져야 한다는 것 또한 어이가 없다. 인생에 뭐 이런 일이 다 있담. 54년 만에 상봉했던 게 엊그제였는데 이제는 다시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니 못 보게 될 것이다. 앞으로 더 황당한 일이 생겨 통일이 된다면 몰라도...한 치 앞을 모르는게 인생이니 일부러 부정적으로 결론지을 필요는 없겠지만........ 부모님이 모두 팔십 노인이니 마음으로는 불가능으로 생각하면서도 말로는 "빨리 통일되어 다시 만나자" 하면서 너댓번도 더 손을 흔들고 껴안고 악수하고 .....햇던 말을 또하고 또하고...
고모는 이젠 오빠의 건강만 챙기고 오래오래 살아서 통일되면 다시 만나자고 한다. 다시는 뭐 보내달라는 편지를 안할 것이라고 또 말한다. 기도하겠다는 말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있어보니 너무나 늙고 노쇄하신것이 가슴 아팠다. 귀도 어둡고 눈도 어두워서 아버지와는 개인적인 얘기를 할 수가 없다 장춘아줌마 집에는 그의 자녀들, 여동생과 여동생의 애기 그리고 장춘아줌마 친구, 혜산에 산다는 보초병 남자와 그의 애인, 브로커 함흥아줌마, 등이 수시로 들락날락하고 현관과 부엌과 우리방에는 벽이 없어서 일거수 일투족이 뻔-한 상황이었다. 여러 의논 사항 중에서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목소리를 조금만 낮추면 크게 말하라고 목소리를 높히고 글로 쓰면 안보인다하시는데 보행이 불편하니 추위에 마당으로 번번이 나갈 수도 없고 그래서 엄마와 나는 복장터질지경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고모를 안전하게 보내기 위한 댓가는 크고도 컸다. 우리는 칼날을 쥔 형편이므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고 매우 분개를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안전이 젤 중요하므로...하여튼 우리는 최선을 다 하였으므로 헤어진 뒤의 일은 고모의 몫이 될 수 밖에 없고 우린 그냥 기도를 하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하여튼 가족상봉을 했다는 사실은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54년 - 반세기가 넘는 숙원사업이 아니던가...
13일 토요일, 아침에 마당에 나가니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계가 새하얗다. 영하 12도의 맑은 날씨에 옷을 너무 껴입어서인지 추위보다는 둔한 몸집에 신경쓰인다. 고모가 어제밤에 떠났으므로 우리는 잠시 시내구경을 하고 점심 전에 장백을 떠나기로 했다 장춘까지는 백두산을 넘어 다시 8시간을 승용차로 달려가서 밤에 도착할 것이다
장백은 압록강변에 있는 현이다. 아주 조그만 읍이다.
길은 넓은 편이고 거리에는 한문과 한글로 초록색 표지판이 있는데 자동차는 주로 경제적인 소형이 많았다. 겉보기엔 보잘것 없어도 눈길에 아주 잘 달리고 오토바이나 자전거에는 모두 찬바람을 막을 수 있게 비닐 상자를 씌워 뒤쪽에도 사람을 태울 수 있게 하였다. 매우 경제적인 지혜로 보였다.
큰시장에는 생선전에 칼치 고등어 병어 등 한국과 별로 다른 점이 없고 과일가게엔 사과, 수박, 귤, 홍시, 바나나, 키위 등 여러가지가 있고 맛도 좋았다. 수퍼마켓에는 굴소스 국수 식초....대체로 우리 동네 골목수퍼 수준으로 여러가지가 보였다. 그런데 푸줏간에는 날이 추워서 겠지만, 냉장고 없이 그냥 고기가 매달려 있고, 유리 진렬장도 없이 피묻은 커다란 도마 위에 고기를 늘어놓고, 썰어서 종이에 담아주어, 보기에 비위생적이라, 비위가 약한 나는 구역질할 뻔 했다.
백화점에는 다녀보아도 물건이 매우 조잡하여 건질 것이 없다. 점원들은 애교가 없고 그저 손님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 큰길가 양품점에는 화장품도 팔고 한국양품점에는 한국의 세련된 털코트며 세타랑 옷들이 걸려있고 한국의 화장품도 많은데 백화점 것보다 훨씬 비싸고 고급들이 많았다. 한쪽에는 유한락스도 있었는데 여기서 매우 인기품목이라고 한다.
여기와서 감탄한 것은 조선족들이 모두 집에서 위성을 달고 한국의 TV를 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보는 것과 똑같이 하루종일 켜고 본다 두어달 전까지는 몇십개가 나왔는데 요즘은 댓개 밖에 못본다며 투덜대며 중국 측에서 제한하는 것 같다고 했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감수성이 예민하므로 직방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한류 열풍의 이유가 여기와서야 이해 되었다.
압록강을 가보았다. 참 그것도 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무 좁고, 너무 가깝고, 뭐라 말 할 수가 없다. 물의 폭은 3 미터에서 5 미터정도이고, 깊이는 발목부터 깊어야 허리정도, 강폭은 100미터를 넘을락 말락........그렇게 가까울 수가!!!!!!!!!!! 중국 쪽에는 초소가 전혀 없고, 이북쪽에는 아주 커다란게 있고 군인들이 망을 보고 있었다. 한쪽에는 중국과 그쪽을 잇는 다리가 있는데 길이는 100 미터 정도이고 다리 양쪽에는 철문이 잠긴채로 있다.
그리고 압록강변을 한참을 따라가며 건너편을 보았는데 산밑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큰길에 건물들이 밀집해있거나 했다. 가까워서 국경같이 보이지 않았다.
국경을 몰래 넘는 사람들이 군인들의 총을 맞기도 하는데, 그들은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므로 여름에 물이 많아지면 심심치 않게 시체가 떠내려오는걸 볼 수 있다 한다.
이북이 워낙 식량난이 심하다보니 그래도 눈을 피해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해산물 따위 물건을 이고 와서 중국에 팔아 플라스틱 생필품이나 옷 따위를 가져가서 장사를 한다고 한다. 강이 워낙 허술해서 가능하게 보였다. 새하얗게 눈이 쌓인 강변에 숱하게 많은 발자욱이 있는걸 보니 알 만하다.
하여튼 압록강은 흐른다...
개고기와 냉면을 잘하는 집이 있다며 점심을 먹고 가라고 했지만 갈길이 바빠서 13일 오전에 장백을 떠나기로 했다. 조선족 운전기사와 11시에 떠나면 장춘에는 저녁 7시경에 도착할 것이다. 한국말을 잘하는 그 기사양반은 꽤나 점잖은 외모인데 알고보니 작년까지 고등학교 미술교사를 하다가 퇴직 후 부인이 경영하는 양품점을 돕고, 자기는 장거리 운전을 시작했는데 이제야 먹고 살만하다고 한다. 3대째 중국에서 살고 있으며 부모는 옛날에 조선의 어디메서 왔는지 모른다고 한다. 아들은 장춘의 고등학교 농구선수인데 내주에 한국으로 시합하러 간다며 얼굴이 환-해진다. 여기서는 한국하고 관련되는 일이라면 뭐라도 크게 환영이다.
장백시내를 떠난지 얼마 안돼서 산길이 시작된다. 하늘은 파랗지만 크리스마스 카드 속을 달리는 양, 온 세상이 흰눈 천지다. 백두산의 원시림은 가도가도 계속 20미터이상 높이의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인 쭉쭉 뻗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덮여있다. "천지 50 Km" 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가려면 꼬불꼬불 오르막이라 두시간이상 올라가야 한다길래 갈길이 바빠서 지나치려니 좀 아쉬운 기분이었다.
우리가 탄 차는 일제 소형차인데 눈길을 속력을 내어 데굴데굴 잘도 간다. 아버지께서는 계속 운전기사와 대화를 하시는데 그 새 정이 들었는지 엊그제와는 달리 서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이다. 계속 산길 풍경이라 엄마와 나는 지난 추억을 더듬으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앞자리에서 기사와의 대화로 뒷자리의 우리얘기에 신경을 못 쓰시다가 엄마와 내가 박장대소를 하며 웃으면 아버지는 뒤돌아보시며 "보기가 좋구만" 하신다.
사실, 평소에는 엄마와 종일 이야기를 나눌 새가 없었다. 내가 결혼 한 지 33년 ...그동안 일상생활의 내 발등의 불을 끄기에만도 분주...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이번에도 고모를 보내고서야 조금 여유를 갖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낭군을 남의 얘기하듯이, 흉인지 자랑인지도 모를 얘기거리로 친구같이 대화를 나누다가 웃곤 했다.
중도에 작은 도시에 들러 식당에 앉았는데 기사가 잘 아는 식당이라 한다. 음식 이름을 몰라서 주춤거리니 주인이 부엌으로 들어와 보라했다. 싱크대에 여러가지 고기와 생선, 야채들이 늘어서 있다. 괜히 이상한거 먹느니 아는 걸 먹자 해서, 동태, 두부, 고사리, 숙주나물, 초록야채 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알았다고 한다. 여태 기름이 지글지글한 중국음식만 먹던 우리는 오랜만에 입에 맞는 것을 먹었다.
달려도 달려도 장춘이 안돼서 꾸벅꾸벅 졸다보니 날이 어둡다. 정확하게 8시간 만에야 창춘에 도착, "장백산호텔"에 도착했다. 별 3개 인데도 그럴싸 했다. 얏호- 우리는 민박집에서 샤워도 못하고 냄새나는 널빤지 화장실에 앉아 일보던 게 끝이라 생각을 하며 기분이 좋아졌다. 목욕탕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오고 노래가 나온다. 아버지가 제일 밝은 얼굴이시다.
저녁은 호텔 내 한국식당에서 된장 백반과 냉면과 떡국을 먹었다. 방에 올라가니 TV에서 한국방송 KBS가 나온다. 저녁뉴스에서 후세인이 잡혔다고 보여준다. 걸르지도 않고 한국과 동시에 그대로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곳의 조선족들은 거의가 한국 TV를 본단다. 여기서는 TV를 보는 게 큰 낙이라 하니 한국 문화가 저절로 가장 효과적으로 스며들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류 열풍도 불게 된 것이리라 이해가 갔다. 중국의 일부를 점령한 것 같은...뭔가 의기양양해지는 기분이다.
두분은 기분좋게 잠이 드셨다. 고모를 만난 흥분과 충격으로 두 분의 건강이 더 나빠져서 귀국길이 어려울까 염려되어 눈치를 살피니,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도리어 숙제를 마친 기분인 듯 하다. 내일은 장춘에서 하루 관광을 해보기로 했다. 알고 보니 여기가 바로 일제시대 만주국의 수도였던 "신경"이고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살던 궁전이 시내에 있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호텔방에 들어와 엄마가 피부에 물집이 생겼다가 터져서 너무나 아프다고 하신다. 동전크기만한게 빨갛게 성이 나있다. 원인을 모르겠는데 어쨋던 그냥 둘 수 없어서 나는 죽염물을 만들어 거기에 발랐다 마르면 또 바르고 했는데 엄마가 아기낳을 때보다 더 아프다고 하시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그리고 난후 아버지께서 양말을 벗다가 여기좀 보라고 해서 가보니까 발 바깥쪽 복숭아뼈에 동전만한 물집 터진 자국이 있는데 엄마의 것과 똑같다. 순간 겁이 났는데 장백에서 무슨 균이 옮았나해서다. 아버지께서는 그냥 두라고 하셨다.
다음날 아침에 약국에 가서 호랑이기름을 사왔다. 데인것으로 추측되어서다. 죽염을 발랐던 곳은 밤새 꾸들꾸들 말라가고 붉은 색이 반으로 줄어 있었다. 잘 생각해보니 장백의 온돌방이 절절 끓었는데 거기서 지진다고 계속 앉아게셨는데 아버지는 방석을 깔았기에 복사뼈만 데였고 엄마는 방석없이 앉아있었기에 다리 살이 짓무른 것이다. 노인들은 감각이 무디어서 그런 수가 많다고 한다. 하여튼 노인들은 어린애같이 잘 보살펴 드려야 함을 새삼 느꼈다.
장백산빈관의 호텔 프론트에 두 아가씨가 안내를 하는데 당연히 통할 줄 알았던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영어를 들으면 서로 되풀이 말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짐작으로 대답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말하는 사람이 없냐고 하니 약국에 가서 아가씨를 데려왔다. 그 아가씨는 조선족인데 키가 크고 얼굴이 넓고 달덩이 같으면서 씩씩하게 생겼다. 말이 통하니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너무나 고마왔다.
시내구경을 한다고 택시를 탔는데 기사와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꿀먹은 벙어리 같이 눈만 데굴데굴....그래서 애초에 시티투어를 2시간 예약을 했다가 40분 만에 그냥 부의가 살던 궁전앞에서 내려버렸다. 날씨가 추워선지 부의 궁전도 조각한 멋있는 문짝을 열고 들어가면 이불같은 발이 드리워 있었다. 요소요소에 미녀 안내원 아가씨들이 서서 사진을 못 찍게 감시하고 있다. 안내문은 영어 일어 중국어로 쓰여 있어서 각자 편한 글로 읽었다.
궁전구경을 다하고 나와 택시를 새로 잡아 탔지만 "장백산 호텔"이라 말하니 기사가 또 고개를 갸우뚱, 못알아듣는다. 내가 당황해 하는 순간, 엄마가 "창베이샹 빙구앙" 하고 혀를 굴리며 콧소리로 말하니까 그제서야 기사가 알아듣고 "오케, 오케" 한다. 엄마의 센스에 아버지와 컨니는 다시 한번 감탄을 하였단다.
날씨는 차겁고 아버지는 보행이 불편하여 일일이 구경하지는 못하시고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는 적이 많았다. 자꾸만 집에 가자고 하셔서 대충보고 나왔는데 호텔에 당도하여 우리 모두는 침대에 곯아떨어졌다. 긴장이 좀 풀렸던 것 같다. 많이 피곤했다.
저녁에는 냉면과 북어국 백반을 먹고, 방에 올라와 후세인이 잡혔다고 해서 내내 TV뉴스를 보았다. 욕실에서 머리를 감았는데 물이 안좋은지 파마머리카락이 빗질이 안되게 뭉쳐있어서 애를 먹었다. 백두산 물을 먹고 온천수같이 물이 좋던 장백이 그리워졌다.
15일에는 새벽부터 일어나 집에 갈 준비를 했다. 가방은 밤에 싸놓았지만 아침에는 아침대로 분주하다. 밤새 눈이 하아얗게 와서 쌓였는데 나무들 사이로 동화속 눈의 여왕이 나타날 것 같은 묘하게 아름다운 분위기이다. 공항까지 제법 오래 걸렸고 동사무소 대기실보다 약간 큰 데서 한시간을 기다려 수속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다 동양인이나 어찌나 꾀죄죄한지 무슨 배급타러 온 행렬같이 보인다. 어쩌다 귀족같애서 가까이 보면 한국말을 한다. 한국에 일자리 얻어 가는 조선족들이 대부분이고 아니면 우리같이 친척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로 보였다.
아버지는 휠체어 서비스를 받아 비행기에 오르셨고 두시간 후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비행기 승객정원이 104명이라는데 빈자리가 없었다. 우리는 승무원이 흴체어 가지고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느라고 제일 마지막에 내려왔다.
가방을 찾아 공항을 빠져 나가면서 혹시나 하는데, 어디선가 총알같이 나타난 기주가 와서 안긴다. 순간 완이의 어릴적 모습과 겹쳐 보인다. 완이랑 반갑게 맞이해주니 아버지와 어머니도 매우 기뻐하신다. 완이가 운전해서 진주로 오기까지 러시아워로 매우 밀렸지만 무사히 집에 도착하였다.
윤경이랑 저녁 준비를 해주어 다같이 둘러앉아 저녁을 나누면서 아버지께서는 54년에 걸친 숙원사업을 이제야 마무리 했다고 하신다 지나간 며칠이 꿈같기만 하다.
우리는 해냈다. 이산가족 상봉을! 우리는 역시 "하면 돤다" 가족이다. 그치?
어제는 "한마음 축제"라 이름한 자선파티에 다녀왔다
현대 아산 김윤규 사장이 주최하는 모임인데 현대 측의 손님들도 왔지만, 고등학교 동창, 대학동창, 사모님 친구들, 현대가 후원하는 농구팀 선수니 테니스팀 선수니 해서 100여명이 넓은 홀에 모여, 저녁 부페를 나누고, 식후에는 여흥시간에 노래방도 벌이고, 때로는 춤들도 추는 등 흥겨운 한마당이었다
모금한 돈으로 이북에 연탄을 사서 보낸다는 것이다 이북에는 요즘 추워져서 굶어 죽는 사람보다 얼어 죽는 사람이 더 많아 난방 문제가 시급하다고 한다. 요한이라는 의사가 있는데 미국인 (한국인 2세) 으로 이북에 의료봉사를 다니는데 폐결핵 치료가 전문이라 이동 치료를 하다보면 농촌이니 벽촌까지 다니면서 그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광경을 많이 보게 된다고 한다. 몰래 사진을 찍어서 실상을 알려 모금운동에 도움을 받으려고 의학전문지에 실었다고 하는데 친구가 그걸 읽고 해준 말이다.
참 어처구니가 없지만 실상이 그렇다니 인도적 차원에서 생각하면 연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삼촌과 숙모같이 김정일 정권 하에서는 한푼도 도와줄 맘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까 그 정권하의 사람들이 얼어죽던 굶어죽던 내 알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에 고모를 만나보니 머리로는 나도 삼촌과 숙모를 이해하겠더라. 그 정권은 인민들을 자기 몸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 소수의 정권 유지를 위해 오로지 무기 증강 만이 인생의 목표인 깡패집단으로 느껴졌다. 일제시대 같이 노예생활을 절대 하지 않으려면 하루에 한끼만 먹더라도 무기를 증강하여 상대방이 여차하면 원자탄으로 불바다를 만들거나 몰살시켜 이기고 봐야 한다고 하더라
안 다치고 평화적 해결을 해야지 싸워서 모두 재만 남으면 거기서 뭘 먹고 어떻게 살으려고 그러는지 참 무식하기도 하다. 자존심만 남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성질 고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가슴은 머리와는 다르게 돌아간다. 거기가 혹 이라크라던가 터키라하면 나도 동의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는 사람도 혈육도 없으니까. 그런데 내 동생이 산다면 , 내 부모가 산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계속 오냐오냐 할수도 없고 모른척 하자니 맘이 편치 않다
내 오른 손은 멀쩡한데 내 왼손이 곪는다고 짤라 버릴 것인가 치료해서 고쳐서 온전한 몸을 만들어야지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그냥 잡기도 놓기도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묘책을 강구해야할 시점이다 요즘 이북의 무역 현황을 보면 전체 수출 양의 제1위 무역국이 한국이라고 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제 3국을 통하여 무역을 했으나 직거래도 제법 있는 모양이다 한국도 생선이나 버섯, 고사리 도라지 호두 잣 각종 말린 나물...등을 외국에서 사먹는 것보다 북한산이 입맛에 맞아서 선호한다
개성, 진남포에 공업단지를 만들어 싼 노동력 이용으로 제품단가를 낮추려는 노력도 있다.
통일이 되면 당분간 한국의 GNP가 낮아질 소지가 많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플러스 요인이 많다고 본다
그런데 한국이 통일이 되는건 이웃나라 일본이나 중국에겐 다른 시각을 갖게 하나 보다 한국이 통일되어 힘을 모으면 질좋고 값싼 물건들이 나와 중국과 경쟁이 될 수 있고 중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조선족들이 한국과 합세하여 엣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선지 중국에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위성방송이 18개나 방영되던 것이 최근 두달 전부터는 두 세개 방송밖에 못보게 중국측에서 조정을 했다. 몇해전까지 한국과 두절된 상태로 살던 대부분의 조선족들이 이제는 모두 한국 TV방송 KBS< MBC, SBS등을 보면서
조선족학교에는 철자법도 북한식이 아닌 한국식으로 개편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유적들을 없애거나 중국위 유적인 양 역사를 바꾸는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한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이제는 북한의 역사학자들과 힘을 합해서 유적을 보존하는 연구활동을 해야한다고 자주 신문기사를 올라고 있다 이북이 가난하다보니 한국과 무역도 많이 하지...이산가족 상봉도 눈감아주고 있지...하여튼 이미 한국 돈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계속 이북으로 가고 있으니까...
교류가 이뤄지면서 그들도 우리도 서로의 사정을 알대로 대충은 다 알고 있다 그런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면서 어쩌면 우리 모두가 현재... 통일을 위한 작업에 관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날이 오는 거 아닌가 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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