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시 산책

김선화 詩人의 시집『꽃불』의 詩세계 /신문웅 시인

이예경 2009. 8. 5. 21:35

김선화 詩人의 시집『꽃불』의 詩세계

                                           申 文 雄(시인/ 평론가)





  1. 화가의 가슴에「꽃불」을 지핀 시인



 


  우주는 암흑물질 속에서 블랙홀에 의한 모든 물질이 압축 흡입되어 질량이 극히 높은 소립자가 빅뱅이란 대변혁을 거처 우주가 창조된 것이다. 그 우주의 창조와 더불어 배태된 물질이 오묘한 탈피의 과정을 거처 변화를 거듭하여 생명이 탄생함이니 무려 45억 년이라는 기나긴 여정을 거처 온 것이다.


  인류의 생성과정은 뜨거운 불덩이로부터 탄생되고 그 불덩이가 생명의 시원始原이니 바로 우리는 불의 자손이요, 불로부터 생명력을 얻었으니 불과는 때어낼 수 없는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불은 사랑의 불일 수도 있고, 열정의 불일 수도 있고, 생명을 요구하는 연인의 불일 수도 있다. 불은 변화와 창조와 소멸과 재생의 힘을 자유로이 간직하고 있으며 우리는 항상 그러한 위험한 불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ꡐ꽃불을 사랑하는 여인 !ꡑ


  김선화(金善化) 시인은 예명이 金宣和, 호는 지송(遲松). 1960년에 충남 계룡산 신도안에서 태어났으니, 운명적으로 범인의 인생과정을 떠난 문학의 정신세계에 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시와 수필, 수필세계와 시의 세계로 넘나들면서 인생을 관조하고 삶을 즐기고 있다.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99『월간문학』수필 신인상과 2006년에 청소년소설에 당선되었다. 수필집으로 『둥지 밖의 새』『눈으로 보는 소리』『소낙비』『포옹』『아버지의 성』, 시집으로『눈뜨고 꿈을 꾸다』『꽃불』을 출간하는 등 중견작가로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시집『꽃불』의 발표로 그의 시문학에 대한 정신세계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으니 불꽃처럼 타오르듯 열정을 꽃불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의 표제 작품 「꽃불」은 마음속 깊이 함축된 내면의 세계를 들켜버린 쑥스러움을ꡐ꽃불 났다, 꽃불 났다ꡑ라는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하고 있다. 



  어깨와 가슴팍을 가로질러


  갈색 핸드백 끈을 늘이고


  꽃물 배어든 그림 앞에 넋 놓고 선


  서른 중반의 단발커트 여인,


  꽃의 형상과 심상이 맞물려 빚어내는


  붉은 빛깔 속으로


  가슴까지 함빡 타들고 있었다




  화가의 이름인 즉


  여성인데


  무엇이


  붓대


  휘두르게 해


  이 무시무시한 그림을


  그려냈을까?




  불현듯 고요를 깨는


  목소리 하나 들린다


  “저, 데이트 좀 합시다.”


  “…….”


  “뒤통수만 보고도 누구인 줄 안다니까요”


  휙 돌아본 시야에 확 들어차는


  순진무구한 눈빛,




  시인의 팔목엔


  소형 카메라 한 대


  화가의 눈처럼 달랑거리고


  좀 전의 심상을 죄다 들켜버린 여인은


  백치같이 배시시 웃고


  꽃불 났다, 꽃불 났어!


  관객 뜸한 그림 전시장 안에




                                                ―「꽃불」 전문




  꽃물이 배어든 그림 앞에서 꽃의 형상과 마음이 붉은 빛깔로 동화되어 빛깔 속으로 빨려 타들어 가는 여인……! 


  분명 우주 창조의 근원과 생명 탄생 신화인 ‘불’의 후손이기에 불에서부터 연유한 모든 시상의 세계를 붉은 빛 불빛에 합일화(合一化) 하고 있다.


  화가이기 전에 여인이고, 여인이기에 연민의 정을 상상의 나래 속으로 묻으려는 여린 눈망울, 그 속에 감추어진 마음을 들킨 여인은 당황하여 꽃불 났다고 외치는 순진성, 바로 시인이 그리고 싶어 하는 여인상일 것이다.






  2. 시는 문학의 신성한 출구다


 


  김선화 시인은 시집『꽃불』의 서문에서, 그의 시 세계를 요연(瞭然)하게 밝혔다.




  “詩는 내 文學의 신성한 出口이다.


  그 이채로운 문을 통해


  갖가지 世界를 넘나든다.




  하여, 어떠한 고정된 틀을


  단호히 거부한다.


  열린 空間에서 무한히


  소통의 言語로 어우러지면 그뿐,




  이 어눌한 노래가


  마주하는 분들의 심연에


  한 자락 훈풍이면 좋겠다.”




                                               ―「序文」전문




  자연의 세계를 바라보고, 자연의 세계를 느끼고, 자연의 감미로움을 모든 감각기능이 아닌 오직 시(詩)라는 창구를 통하여 바라보려는 시심(詩心)은 김선화 시인의 올곧게 추구하는 시의 세계이다. 그리고 언제나 붉은 꽃, 붉은 빛깔, 붉은 꽃밭에서 살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인간이 태동한 본연의 고향에서 연유하여 오직 불에서 살고, 불에 귀의(歸依)하려는 마음일 것이다.




  비바람 치고


  작살비가 훑고 지나갔어도


  해물 녘


  진홍빛 꽃숭어리로 피어있는


  저 엽렵한 목백일홍!




  안뜰에 핀 붉은 꽃밭


  수미산 떠메다가 눌러놓고


  유유자적 시치미 뚝 떼는데


  귓불 간질이는 바람결


  갈 길 잃었는가


  울타리 안을 감돌며 이~잉 잉잉



                                      ―「화답詩․3」전문




  자연의 변화 속에서도 꼿꼿하게 서 있는 백일홍과 붉은 꽃밭을, 부처님의 높은 불법에서 가르치는 수미산(須彌山 Sumeru)으로 인도한다. 세계의 중심사상으로 수미산 꼭대기 사천왕 위 부처님의 나라 도리천 붉은 꽃밭으로 불러들여 마음의 안위를 찾고자 한다. 마음은 전적으로 생명의 근원의 의문에 대한 한없는 방황과 이승의 본질을 찾고자 함이니, 시인의 마음속에 이는 고뇌에는 깊은 불심이 자리하고, 이승의 삶을 종내는 불법에 귀의(歸依)해 의지하려 함일 것이다.






  3. 인간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고뇌(苦惱)




  가을밤 깊은 상념에서 느끼는 고독과 정적의 세계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고민하는 생명의 존재의 본 모습과 윤회(輪廻)의 과정에서 전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고뇌(苦惱)는 시인만의 것이 아닌 모두의 고민일 것이다.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무엇인가?”  


  짧은 초분에 존재하였다 사라지는 생명은 이승에서 어떤 존재의 목적을 가지는가. 힘없이 윤회의 궤도에 휩쓸려 무의식의 상태에서 그저 굴러가는 바퀴인가?




  귓바퀴를 돌아


  가슴 속 결을 읽는


  풀벌레 소리




  이전,


  이 몸의 탈(脫)은


  무엇이었을까?


                        


                                 ―「추야(秋夜)」




  인간의 전생의 형상과 존재하였으리라 하는 모습, 그에 따른 변화 곧 탈이라는 변태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윤회에 대한 역설적 가정을 설정치 않을 수 없다.


  “무엇에서 어떻게, 어디로 왜!”




  인간의 근본적인 영적 존재의 불확실성(不確實性)과 부존재성(不存在性)을 윤회와 무아(無我)의 사상체계로 합리화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고뇌일 수밖에 없다. 


    




  4. 윤회(輪廻)와 업보(業報)의 산사(山寺)에서 대화




  탄생과 소멸의 윤회(輪廻) 과정에서 우리는 찰나의 순간에 잠시 머무르는 이승의 삶에 존재하고 있다. 영원한 순환의 세계에 놓인 생명의 존재와 삶의 가치에 대한 고뇌(苦惱)와 업보(業報)의 두려움을 겪어야 하는 영적 존재이니, 이는 자아(自我)의 존재를 의식함에서부터 연기(緣起)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회오리에 말려들어 업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시상(詩想)을, 깊은 산사(山寺)에서 조용하게 숙명적으로 토해 내는 대화는 곧 인간 본연의 고통이다. 업보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생사의 분별망집(分別妄執)에서 시인만이 그 고독을 절실하게 파헤쳐야 하는 것은 피안(彼岸)에 이르려는 시인 스스로가 택한 고(苦)일 것이다.


  생명은 어느 순간의 연유(緣由)로 태어나는 날부터 고(苦)를 짊어져야 한다. 그 고(苦)는 스스로가 감내(堪耐)하여야 하는 것일 수도, 내세(來歲)를 위한 것일 수도, 시상(詩想)에 몸부림치는 절규(絶叫)일 수도 있다.




  탑돌이를 하고


  대법당에서 부처님을 알현하고


  산신각에 들러 약사여래상을 우러러


  명치끝 아린 사연 숨죽여 고하고


  약수로 입안을 말끔히 헹구고


  주지스님께 3배를 올렸다


  그러고도 서너 걸음 물러나


  차마 울 수도 없는 속내


  눈 맞춤으로 대신한다




                                             ―「사월 산사에서」중에서


                 


  부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苦)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한 고(苦)는 욕망과 번욕(繁縟)-번문욕례(繁文縟禮)-에서부터 일어나는 원인으로 나(我)의 존재를 인식케 하는 것이니, 욕망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 청정한 상태에 이르기 위하여 나(我)를 버려야 하는 운명적인 자리에 놓여 있다.


  시인은 산사에 임하여 숨죽이고 공경과 정갈함으로도 부족하여 마음으로 속죄하려 함은 곧 영혼의 나약함과 경이(驚異)한 영감(靈感)을 통하여 의지하여야 할 부처님을 우러러 의탁하려는 순수한 마음가짐이다.


  몇 발짝 물러나 애원의 속내를 감추고 울 수밖에 없는 마음과, 겸손하고 감성적 표현을 이성적으로 절제하며 내면으로 삭이려 한다. 또한 의탁할 마음으로 몸을 굽혀 무엇인가에 애원하려는 듯 속내를 감추며 기원하는 마음은 결코 고뇌의 심연에서 벗어나기 위함만은 아니다.


  이러한 마음은 바로 시인이 표현하고 싶어 하고 그러한 마음이기를 바라는 염원이고 그것은 스스로가 내면에서 간구(懇求)하는 자세로 영원의 이상세계가 현실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인류는 끝없이 분쟁과 투쟁 속에 고통을 주고받고 하기를 지속해 왔다. 또한 나(我)의 존재성과 욕구를 충족할 욕망을 위하여 끝없는 다가올 내세를 잊고 현실 존재만의 세계를 추구해 왔으며 또한 지속되어 갈 것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의 순간임을 인식하지 못함이다. 이승의 삶은 바로 고(苦)의 연속이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것이다.


  시인은 스스로의 여린 자세로 부처님에 대하여 깊은 신뢰와 연약하여 지려는 마음의 안위를 위한 탑돌이를 한다. 부처님과 약사여래상에 숨죽여 임하는 정성스런 마음과 스님에게까지 겸손하고도 부족함을 느낀다. 바로 우리의 삶에 있어 고통을 극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겸손과 애원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이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차마 울 수도 없는 속내 눈 맞춤으로 대신한다. 자신의 분신인 아기의 아픔에 엄마는 본인의 아픈 고통보다 더한 애처로운 고통을 지녀 부처님에 의지하고픈 일념에서 내적으로 삭이고 아픈 가슴을 감추고 눈짓으로만 대신하는 시어(詩語)는 느끼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준다. 절제된 감성을 침묵과 억제된 표현인 눈빛으로 슬픈 마음을 전달하고자 한다.     


  사월은 자연 만물이 소생하고 생명의 불이 타오르는 계절이다. 생명이 태동하는 불꽃을 시인은 ‘꽃불’로 본 것이다. 꽃불, 그것은 자연의 생동함이 꽃이 피듯 피어나는 모습을 아름다운 불이 되어 불처럼 활활 일어 찬란하고 밝은 빛을 주어 광명 속에 살아있음을 확인시키는 생명의 태동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한 불같이 일어나는 열정과 절제된, 순박하고 순수한 영민(英敏)함의 소유자임에도 산사에서는 차마 울 수도 없는 내면의 속내를 눈웃음으로 대신하려는, 바로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순진성이고 내면의 마음을 보이지 않으려는 겸손한 시상(詩想)이다.




  노스님의


  중년 시절을 아는 속세 여인과


  중년 여인의


  첫돌바기 아이엄마 시절을 아는 스님,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무디다


  그 아이가 아파요. 


  업보대로 사는 걸.


  눈빛으로 이미


  산사와 속세가 섞인다




                                     ―「사월 산사에서」중에서




  시인은 인연이 이승의 삶에서 현실적 과정이기 전에 윤회(輪廻)의 과정 속에 결정되고 성립된 것임으로 어쩔 수 없는 포기의 것으로 본다. 업보대로 사는 걸, 현실의 존재 자체를 체념하고 윤회의 과정 속에서 순환의 일면으로 인식하여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삶의 존재 자체를 전생의 업보라는 단정적 판단에는 의문이 있다. 불성(佛性)이나 인성(人性)에 있어 존재의 변화를 부인하고 동화되어야 한다고 보고 동화되는 과정에서 자연과의 일치성을 인정하고 만다.


  불성(佛性)은 선정(禪定)의 좌선에 의하여 심신의 통일된 상태에서 마음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명상으로 형상화하고 마음속 깊은 지성을 다하는 선행으로 이룰 수 있다.


  스님과 아이엄마는 업보대로 사는 걸에 동의하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에서 해탈이라는 경지를 이룬다는 희망을 포기함인가.


  불법에서 자(慈)는 곧 중생에게 낙(樂) 주는 자(慈)이고, 비(悲)는 고(苦)를 없애 주는 형상으로, 일반적인ꡐ사랑ꡑ의 애(愛)와는 구분된다 할 것이다.


  아기의 아픔을 단순 업보로의 귀결은 현실의 비애와 의지를 포기함이니 인(因)은 과(果)의 원인이며 무위는 보(報)를 형성함이니 최선을 다함만이 진솔한 삶의 의미가 되고 포기는 무위를 낳게 한다.


  눈빛으로 이미 산사와 속세가 섞인다. 위로 받지 못하고 회생의 희망을 주어진 운명에 맡긴다는 업보론(業報論)으로는 이 땅에서의 행위에 따른 내세(來歲)를 지향하는 윤회의 논리에 적합하다 할 수 없다.


  시인은 적극적인 삶의 의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희망적이고 앞날에 대한 지향적이어야 한다. 노스님과 아이엄마간의 인(因)만을 의식한 것이지 과(果)에 대하여 포기하는 체념 자세는 인식과정에 있어 바람직하다 할 수 없다.


            


  제가 전생에 참 많은 죄를 지었나 봐요


  그 말이 오장육부에 녹아


  배설될 즈음


  스님도 무겁게 입을 연다


  죄업 씻으러 왔다가 또 짓고 가지.


  그게 인생이야.




  풍경소리


  대신 울어주는 봄날


  산사 마당가에서


  여인은 좀처럼


  돌아설 줄을 모른다 


 


                                 ―「사월 산사에서」중에서




이승의 삶 중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 있어 생물학적 변화인 생로병사를 카르만〔業報〕이라 하기엔 의문이 있다. 업보란 선악의 행업으로 말미암은 과보(果報)를 이르는 의미로서의 인식이 타당할 것이다. ‘죄업을 씻으러 왔다가 또 짓고 가지/ 그게 인생이야’ 이승 삶의 일상을 죄업으로 확대해석하는 시어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승의 삶 즉 존재를 단순 카르만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론적인 죄업과 업보에 귀일 시키는 것은 존재라는 현상인식을 배제할 수만은 없다.


  불교에 있어 존재라 함은 실제로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물질적, 생물학적 또는 정신적인 현상의 집합체인 것이다. 육체라는 것은 몇 개의 물질적인 요소들의 모임이고, 정신이라 함은 육체가 가지고 있는 감각기관들과 그에서 일어나는 대상들간의 접촉에서 발생되는,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윤회의 원리란 영혼은 다른 세계에서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이 지상이나 다른 곳에 그의 카르만〔業報〕의 잔고를 가지고 오게 된다. 이 카르만의 잔고가 새로운 생을 결정짓는다. 그리고 사회적인 계급, 성(姓), 영혼이 취하게 될 모습 등은 모두 카르만의 잔고가 결정한다. 이 잔고가 완전히 고갈되면 윤회는 끝나게 되고 해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에 있어 일상 일어나는 선악행위 이외의 자연현상과 생명유지 행위는 업보라 하여 죄의식을 느껴야 할 이유는 없다. 불교는 무아(無我)의 사상과 윤회(輪廻)의 사상이 서로 상충적인 해석이 일어나며 이로써 궁극적인 해탈의 정의와도 합일하여야하는 문제를 낳고 있다.


  산사에서 일어나는 운명과 업보를 시인은 깊이 있는 자세로 이를 관망하고 조용한 산사의 정서를 한껏 파헤쳐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러고는 삶의 자세를 냉정히 바라보게 하여 추구하는 영혼의 갈 길을 고민하게 하고 있다.


  산사 봄날의 고요한 정적(靜寂) 속에 풍경(風景)은 이승의 영혼들을 깨우는 소리가 되어 잔잔하게 메아리쳐 울려 퍼져나간다.


  시인은 그 소리에 귀 기울여 시감(詩感)을 통한 윤회와 무아의 번민하는 의식 속에 고뇌에 차 헤매는 여인이 되어 산사에서 가볍게 발길을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5. 감성의 보고인 시(詩)의 잔치


  시집『꽃불』의 제1부 ‘꽃불’ 외에도, 제2부 ‘정자가 비치는 풍경’, 제3부 ‘하늘 보는 눈’, 제4부 ‘푸른 까닭이다’에 걸쳐있는 50여 편의 詩는 시인의 진솔하고 풍부한 시상을 남김없이 발산하고 있다. 그 한편 한편이 생명의 존재에 대한 의문과 삶에 대한 이상향을 꿈꾸고 삶의 존재의미를 찾아 극대화하려는 미적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아름다운 날


  짓누른 시간 속에서


  숫한 언어들이 불뚝거린다


  속심지에 말려 붙여도


  멈춰지지 않는 언어의 조합


  그리고 해체




  어느 날


  작은 나비 때로 화(化)한 언어들이


  푸르르푸르륵 날개를 편다


  꾸역꾸역 삼킨 정념(情念)


  덕지덕지 키워


  그대 여전히 태(態) 고운 날


  심연 저쪽 세월 섶에서


  근질근질 꼼지락꼼지락




                                               ―「부화(孵化)」전문


                           


  김선화 시인은 중견 작가로서 다섯 편의 수필집을 발표하고, 두 편의 시집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국제펜클럽 등 각종 단체에서의 역할이 매우 놀라워 할만하다.


  시와 수필, 그리고 아동문학에까지 넘나드는 그의 뛰어난 역량은 지칠 줄 모르는 힘의 바탕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의 빼어난 인품에 넉넉한 마음에서 오는 정감은 보다 많은 작품 세계를 개척할 것이다.   <<문학세계>> 2009. 5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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