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
윤오영
어린 염소 세 마리가 달달거리며 보도 위로 주인을 따라간다.
염소는 다리가 짧다. 주인이 느릿느릿 놀 양으로 쇠걸음을 걸으면 염소는 종종걸음으로 빨리 따라가야 한다. 두 마리는 긴 줄로 목을 매어 주인의 뒷짐진 손에 쥐여가고 한 마리는 목도 안 매고 따로 떨어져 있건만 서로 떨어질세라 열심히 따라간다. 마치 어린애들이 엄마를 놓칠까봐, 혹은 길을 잃을까봐 부지런히 따라가듯.
석양은 보도 위에 반쯤 음영을 던져 있고, 달달거리고 따라가는 염소의 어린 모습은 슬펐다.
주인은 기저귀처럼 차복차복 갠 염소 껍질 네 개를 묶어서 메고 간다. 아침에 일곱 마리가 따라왔을 것이다. 그 중 네 마리는 팔리고, 지금 세 마리가 남아서, 팔릴 곳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팔리게 되면, 소금 한 줌을 물고 캑캑소리 한 마디에, 가죽을 벗기고 솥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저 주인의 어깨 위에는 가죽 기저귀가 또 한 장 늘 것이다. 그러나 염소는 눈앞의 운명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방 소파의 어린이 예찬에는 “어린이는 천사외다. 시퍼런 칼날을 들고 찌르려 해도 찔리는 그 순간까지는 벙글벙글 웃고 있습니다. 얼마나 천진난만하고 성스럽습니까. 그는 천사외다.”했다. 그렇다면 나도 “염소는 천사외다.” 할 것이다.
주인의 뒤를 따라 석양에 보도 위를 걸어가는 어린 염소의 검은 모습은 슬프다. 짧은 다리에 뒤뚝거리는, 굽이 높아 전족(纏足)한 청녀(淸女)의 쫓기는 종종걸음이다. 조그만 몸집이 달달거려 추위 타는 어린애 모습니다. 이상스럽게도 위로 들린 짧은 꼬리 밑에 감추지 못한 연하고 검푸른 항문이 가엾다. 수염이라기에는 너무나 앙징한 턱밑의 귀여운 수염, 그리고 게다가 이따금씩 어린애 목소리로 우는 그 울음, 조물주는 동물을 점지할 때, 이런 슬픈 우형도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페이터는 일찍이 사람들에게 “무한한 물상(物象) 가운데 네가 향수한 부분이 어떻게 작고, 무한한 시간 가운데 네게 허여된 시간이 어떻게 짧고, 운명 앞에 네 존재가 어떻게 미소(微小)한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기꺼이 운명의 직녀, 클로우도우의 베틀에 몸을 맡기고, 여신이 너를 실삼아 어떤 베를 짜든 마음을 쓰지 말라”했다. 이 염소는 충실한 페이터의 사도다. 그리고 그는 또 “네 생명이 속절없고, 너의 직무, 너의 경영이 허무하다 할지라도, 적어도 치열한 불길이 열과 빛으로 변화시키듯 하잘것없는 속서(俗事)나마 그것을 네 본성에 맞도록 동화시키기까지는 머물러 있으라”했다. 염소가 그 주인의 뒤를 총총히 따르듯, 그리고 주인이 저를 흥정하고 있는 동안은 주인 옆에 온순하게 충실히 기다리고 서 있듯, 그리고 길가에 버려 있는 무청 시래기 옆에 세워두면 다투어 푸른 잎을 뜯어먹듯, 그리고 다시 끌고 가면 먹던 것을 놓고 총총히 따라가듯.
이 세 마리의 어린 염소는 오늘 저녁에 다 같이 돌아가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나오게 될 것인가, 혹은 그 중의 한 마리는 가다가 팔려서 껍질을 벗겨 솥 속으로 들어가고, 두 마리만이 가게 될 것인가, 또는 어느 것이 팔리고, 어느 것이 남아서 외롭게 황혼의 거리를 타달거리고 갈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염소 자신도, 끌고 가는 주인도, 아무도 모른다. 염소를 끌고 팔러 다니는 저 주인은 또 지금 자기가 걸어가는 그 길은 알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염소가 지나간 그 보도 위로 걸어오는 것이다.
* 윤오영(1907 - 1976) 선생님의 글입니다. 호는 치옹이며 양정고보를 졸업한 후 20여 년간 보성고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셨습니다. 1959년 <<현대문학>>에 수필 <측상락>을 발표하셨고, 수필집으로는 <<고독의 반추>>,<<방망이 깎던 노인>>이 있습니다. 이 글은 <<방망이 깎던 노인>>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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