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수필의 형상화/ 손광성

이예경 2009. 7. 10. 21:06

해석 解釋 에서 형상화 形象化 까지
 

본고는 <에세이문학> 2006년 제4회 하계수필강좌에서 발표한 논문을 <에세이문학> 2006 여름호에 수록한 것을 필자의 허락을 얻어 본지에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편집실)

   
   

  글쓰기의 기본은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해석(解釋)에서 출발한다. 세계란 사물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건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세계라고 하는 텍스트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해석은 해석으로 끝나지 않는다. 설혹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그 해석된 내용이 구체적 형체를 갖추는 단계까지 올라가야 한편의 글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형상화(形象化)이다. 그런데 형상화란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구체적 사물이라도 그것을 감각적으로 강화시킬 경우에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문학적 성취는 첫째 참신한 소재, 둘째 참신한 해석, 셋째 참신한 표현, 즉 형상화에 의해 성패가 갈린다. 이 글에서는 소재 선택을 제외한, 해석과 형상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그것이 수필의 예술성 실현에 어떻게 기여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해석은 우선 참신하고 개성적이어야 한다. 예술적 감동은 바로 그 참신한 발상에서 생성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선배나 동료작가가 해석한 의미와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모방이거나 표절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개성적인 시각이란 "낯설게 하기"라는 쉬클로브스키적 시각을 의미한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낯설게 하기"라는 말은 '낯설게 보기'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낯설게 하기"란 개념 속에는  대상에 대한 '비 일상적 시각', '뒤집어 보기', '현미경적 시각'이란 항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낯설게 보기"가 해석의 영역에 속한다면 "낯설게 하기"는 표현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낯설게 봐야' '낯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 대나무라는 대상이 있다고 하자. 만약 대상의 형체를 보고 묘사한다거나 그 실용성 같은 것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스케치나 설명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나무라는 평범한 대상을 자기만의 시각으로 해석할 때 사실의 세계를 뛰어넘는, 한 차원 높은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대나무가 처음 돋아날 때부터 단번에 쑥 자라 버리는 것에서 선천적으로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 하루 아침에 문득 깨달음이 향상되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며, 대나무가 자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것에서 후천적으로 노력한 사람의 깨달음이 점진적으로 향상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대나무가 속이 빈 것에서는 마음을 비운 사람의 참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월등사죽루죽기(月燈寺竹褸竹記)> 이인로

  이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나무에서 '지조'나 '절개' 같은 것을 읽었다면 그건 선배들의 해석을 모방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인로는, 대나무가 단번에 다 자라 버리는 것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의 경지를 읽고, 자랄수록 목질이 단단해지는 것에서 점오(漸悟)의 경지를 읽었다. 그리고 속이 비었다는 사실에서 '공허'나 '부실'을 읽은 것이 아니고, 욕심을 비운 사람의 마음을 읽었다. 대나무에 대한 이런 해석은 개성적이기 때문에, 비록 대나무가 평범한 소재라 하더라도 참신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늘 글감이 없다고 푸념한다. 그러나 글감은 도처에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읽지 못하기 때문에 글감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대하는 사물도 어떻게 보느냐, 즉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처럼 글감이 되기도 하고 못 되기도 한다. 다음 글에서도 개성적 해석이 한 편의 글을 어떻게 완성시키는가를 볼 수 있다.

(1) 지금은 없어졌지만, 농부가 늙어서 드는 농사 연장에 살포라는 것이 있었다. 물꼬를 보는데 쓰는 연장인데, 긴 자루 끝에 손바닥 크기의 납작하게 날이 선 네모진 삽이 달렸다. 언뜻 보면 창 같다. 실제로 장비처럼 전의가 충천해서 고샅을 내닫는 늙은 농부를 보면 살포를 내지를 창처럼 꼬나 들었다.
물싸움을 하러 가는 것이다. 그러나 저 살포로 일내지 하는 걱정은 기우다. 살포는 노농(老農)의 원로적 품위 유지용이지 결코 흉기는 아니다.(중략)
(2) 살포는 연장이라기 보다 가세의 영역을 지키는 한 집안 대주의 의지를 고양하는 물건이다. 연장의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삽이 월등 낫지만 그건 젊은이들의 연장이다. 삽이 실권이라면 살포는 권위다. -<살포> 목성균

  농기구의 하나인 '살포'의 의미를 노농의 '품위 유지용' 또는 '노농의 권위'로 읽고 있다. 다만 하나의 농기구에 지나지 않는데도 실용성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높은 정신적 차원의 의미로 해석했다. 이 글이 만약에 살포의 기능과 용도만을 말했더라면 그건 설명문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이 수필이 성공을 거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석은 이와 같은 어떤 구체적 사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체험적 사건도 그 해석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음에 예시한 것과 같은 사건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오늘 아침도 여느 때와 같이 전동차를 탔다. 옥수역을 지나고 있는데, 할머니 한분이 껌을 팔고 있었다. 나는 시골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 얼른 천 원짜리를 꺼내서 노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자 노인은 껌 한 통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그러자 노인은 돈을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위와 같은 의외의 반응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가난한 사람이 공짜로 천 원을 벌면 고마워할 일이지 자존심은 무슨 자존심이냐고 해석할 수도 있고, 둘째는 비록 가난하지만 구걸은 하지 않는다는 노인의 꼿꼿한 자존심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물이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글의 방향과 성패가 결정된다. 좋은 글의 창작 조건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이와 같이 세상을 읽는 독해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 형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해석이 구체적 사물이나 사건의 의미 읽기라면 형상화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구체적 사물을 더 감각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하나의 문학작품이 성공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이 형상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수필의 예술성을 강조하면서도 구체적 방법론에 부딪히면 뜬구름잡기 식이 되는 것은 바로 이 형상화 과정이 무엇인지, 또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깊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석만 있고 형상화가 없으면 관념적인 글이 되고 말지만 해석과 형상화가 함께 어우러지면 감동이 배가 된다. 잘된 작품은 모두 이 과정을 거치고 있다. 따라서 해석과 형상화는 문학 작품이 갖추어야 하는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라 하겠다.

  그런데 서정수필에서 이 형상화란 주로 비유라는 과정을 통해서 도달하게 된다. 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비유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사물로 치환할 뿐만 아니라 같은 구체적 사물을 감각적으로 강화하기도 한다. 다음 시를 보자.

(1)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온몸을 풀어 우리의 죄를 사하듯
   더러운 손을 씻어 주었다
   밖에서 묻혀 오는 온갖 불순을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 주었다

   (중략)

(2) 살면 살수록 때가 타는 세상에
   뒤끝이 깨끗한 消耗는
   언제나 아름답고 아쉽듯
   헌신적인 보혈로 생을 마치는
   이 시대의 희한한 聖者

   이 시인은 '비누'라고 하는 구체적 사물의 역할과 의미를 (1)과 (2)에서 해석했다. 그리고 그 해석한 내용을 (2)의 마지막 행에서 '성자'로 비유함으로써 형상화에 성공한 것이다. 비누라는 일상의 사물이 성자라는 자기 희생적 인격체로 변신하여 우리의 감동을 출렁이게 한다. 만약에 마지막까지 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해석에서 멈췄다면 지배적 심상이 결여된 글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예 하나를 더 들어 본다.

  인생은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

  이제 이 시를 분석하면, 인생이란 추상적인 개념을 술잔이라는 구체적 사물로 형상화시켰다. 즉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인생을 술잔으로, 그것도 '빈 술잔'으로 비유함으로써 형상화에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인생'에서 곧바로 '빈 술잔'으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해석의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인생이란 대상에서 '공허함' 또는 '허무함'을 읽어내고, 그것을 '빈 술잔'이란 보조관념을 빌어다가 추상적 개념인 '공허'를 형상화한 것이다.

  비유가 없다면 오늘날과 같은 문학적 성과는 많은 부분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시뿐 아니라 서정수필에서 그것은 절대적이다. 비유는 기적을 낳는다. 예술적 수필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피천득의 수필에서 우리는 비유를 통해 형상화에 성공한 예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1) 오월은 금방 찬물에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 <오월> 피천득

  (2)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 <수필> 피천득

  윗글 (1)에서는 오월이란 개념을 찬물에 세수한 스물한 살 여인의 얼굴과 흰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에 비유함으로써 오월의 청신한 계절감을 감각적으로 구체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2)에서는 수필이란 추상적 개념을 주택가에 나 있는 길로 비유함으로써 생활 주변에서 소재를 구하는 수필 장르의 특징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해석과 형상화의 과정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 주는 수필은 아마도 이양하의 <나무>가 아닌가 한다.

a. 나무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않는다.
b. 나무는 고독을 안다. 나무는 고독을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긴다.
c. 나무는 원망하지 않는다. 베어 간 재목이 혹 자기를 해칠 도끼 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a'. 나무는 안분지족의 현인이다.
b'. 나무는 고독의 철인이다.
c'. 나무는 견인주의자다.

  a,b,c는 나무라는 소재에 대한 해석이고 a',b',c'는 그 해석된 내용을 비유를 통하여 형상화시킨 것이다.

  한편 서정수필에 비해 서사수필에서는 형상화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용어는 서사수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시나 수필의 형상화가 비유에 의존하는 반면 서사문에서는 인물, 사건, 배경과 같은 요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1) '겁(劫)'이 천지 개벽에서 다음 천지 개벽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2) 여기 호수가 있다. 호숫가에 사방 일 입방미터가 되는 바위가 있다. 일 년에 한 번씩 하늘에서 선녀가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서 호수에서 멱을 감은 후 천의(天衣)를 입고 그 바위에 올라가 춤을 춘다. 그때 천의가 바위에 스치는 마찰에 의해 그 바위가 다 달아 없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겁(劫겁)이라 한다.

  (1)은 겁(劫)이라는 어휘의 사전적 의미이다. (2)는 불가에서 불자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해서 흔히 하는 이야기다. (1)은 설명문으로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거기에는 감동이 없다. (2)는 서사문학이다. 인물, 사건, 배경이 있고 그것으로 해서 '겁'이라는 어휘가 경악할 정도의 시간임을 알게 된다. 똑같은 추상적 개념을 말하고 있지만 효과는 이렇게 다르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형상화는 서사문학에서 미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수필은 허구의 스토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사적 성격이 강한 자전적 수필에서는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주제를 감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와 같은 형상화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다음 글은 어느 수강생이 제출한 수필 초고 중의 일부이다.

  (A) 나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여러 면에서 다르셨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다르셨다. 친할머니는 성격이 괄괄해서 무슨 일이든 척척 잘도 처리하셨다. 거기에 비해서 외할머니는 성격이 부드러우시고 안온하시었다. 목소리도 나직하셨고, 매사에 서두는 일 없으셨다.
  나는 어려서 종기를 자주 앓았는데 그 종기를 치료하는 방법도 두 분이 다르셨다. 두 분은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달랐지만 나를 사랑하신 점에서는 낫고 못함이 없으셨다. 두 분 할머니가 그립다.

  이 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두 주인공에 대한 정보 수준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일반적 성격의 나열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구체성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인물이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감동도 훨씬 떨어진다. 형상화에 실패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첫째, 인물의 외양을 볼 수 없다. 따라서 구체적 캐릭터로 형상화되지 못했다. 둘째는 "종기를 치료하는 방법도 두 분이 다르셨다"고만 되어 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랐는지 언급이 없다. 인물의 성격 제시도 직접 설명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추상성을 면치 못했다.

  이 글이 구체적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구체적 진술이 보충되어야 한다. 다음 글은 이런 점이 보완된 글이다. 앞의 글과 비교해 보기로 한다.

(A') 나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여러 면에서 다르셨다.
친할머니는 얼굴이 긴 편이고 키도 크셨다. 성격은 매우 괄괄해서 무슨 일이든 척척 처리하셨다. 말하자면 장부형 여인이셨던 것 같다. 거기에 비해서 외할머니는 얼굴이 둥근 편이시고 키는 중키 정도였다. 매우 부드럽고 안온하신 분이셨다. 목소리는 나직했고 매사에 서두는 일이 없으셨다. 친할머니와는 달리 전형적 한국 외할머니 상이였던 것 같다.
나는 어려서 종기가 자주 나곤 했는데, 그 종기를 치료하는 방법도 두 분이 다르셨다.
친할머니는 직접 종기를 짜셨다. 그래도 안 나으면 그 더러운 종기를 입으로 빠셨다. 아프고 더러웠지만 그러면 신기하게도 나았다. 하지만 친할머니의 외과적 치료법은 너무 아파서 싫었다.
외할머니는 달랐다. 언젠가 외할머니 댁에 갔을 때 일이다. 그때도 종기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외할머니는 보시더니 아프겠다고 위로하시고는 목화씨 발린 것을 주면서 먹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기다리면 낫는다고 하셨다.
집으로 오는 길이었는데 허리께가 끈끈해서 보니 종기에 구멍이 뻥 뚫리고 고름이 흘러 내렸다. 저녁 때가 되니 근질근질했고 며칠 후 말끔히 나았다. 외할머니의 내과적 치료가 신기하기만 했다. 두 분이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다르셨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점에서는 낫고 못함이 없으셨다. 두 분 할머니가 그립다.

  (A')에서 밑줄을 친 부분은 (A)에서 미비한 내용을 보충한 것이다. 우선 (A)에서 결여되었던 주인공의 외모가 구체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성격이 설명에 의하지 않고 행위에 의해 간접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럼으로써 '장부형'과 '전형적 한국 외할머니의 상'이라고만 표현했던 (A)에서 놓치고 있는 예술적 감동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 진술은 이렇게 추상적 개념은 물론 사물이나 사건과 인물까지 감각적으로 강화시켜서 살아 움직이게 한다.

  이상에서 한 작가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을 수필을 중심으로 생각 해 보았다.

  다시 말하자면 문학의 성취도는 참신한 소재와 그에 대한 참신한 해석 그리고 그 해석한 내용을 어떻게 참신하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 경우 비록 소재가 참신하지 않더라도 그 해석이 참신하면 반은 성공한 작품이다. 거기에 표현, 즉 형상화가 이루어졌다면 성공은 보장된 셈이다. 이렇게 하나의 작품은 세계에 대한 개성적 해석과 형상화를 통해 예술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수필의 예술성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도달 할 수 있는 목표다. 해석에서 형상화까지의 과정은 그 가운데 하나의 통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손광성

수필가 . 동양화가
한국수필문학진흥회장
서울시립대학 시민대학 문예창작 강사
현대문학상 수상
저서 : '나도 꽃처럼 피어나고 싶다' '한 송이 수련 위에 부는 바람처럼'
      '작은 것들의 눈부신 이야기' '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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