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마음

아버님의 명화집

이예경 2009. 7. 9. 14:19

아버님의 명화집

 

추석에 시아버님 성묘를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아버님이 생전에는 어렵기만 하신 분이었는데 돌아가신 지도 3년이 지났는데,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아버님이 82세 때였다. 어느 날 안부전화를 드린 내게 컴퓨터를 배우고 싶다고 하셨다. 강습을 받아보니 재미있다고 하셔서 컴퓨터를 선물했는데, 그전에 며느리에게 철자법을 고쳐 보내라고 아버님이 우편으로 보내시던 육필원고들은 한글문서가 되어 이멜로 보내오셨다. 얼마 후 그 글이 실린 교회 회보를 보내주셨고 그렇게 이멜이 꽤 많이 오고갔다. 

수필 내용 중에는 어린 시절, 육이오 동란, 집안 내력 등인데 조상들 이야기는 내가 혼자 보기엔 아까운 내용도 많았다. 아버님께 글을 좀 더 모아서 책을 만들어 나누어 갖고 싶다고 했다. 처음엔 완강히 사양하셨지만 어느 날 수줍은 미소와 함께 원고 뭉치를 넌지시 내 손에 쥐어주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양지마을 이야기" 라는 책이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을 난생 처음 뵈었다. 책을 한아름 안으신 채 벙글벙글 입을 다물지를 못하셨다. 평소의 근엄하신 모습과는 딴판이다. 그 뒤로 뵐 때마다 활짝 웃으시는 모습으로 그 책을 어디어디 주었더니 이렇게 저렇게 말하더라 하셨다. 그렇게까지 기뻐하실 줄을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님께서도 덩달아 책에 대한 인사를 많이  받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아버님이 컴퓨터도 잘 하시고 글을 잘 쓰시니 자랑스러우시겠다고 했더니 의외의 대답을 하신다. 글을 쓰시는 건 잠간이고 툭하면 세계 각국 미녀 감상에 정신없단다. 그렇다고 그림속의 미녀를 가지고 바가지를 긁는 것도 뭣하다 하시며 나에게 눈을 흘기신다. 컴퓨터에 아버님을 뺏기신 게 며느리 탓이라고 생각하시는 듯, 사뭇 심각한 얼굴이시다. 

그러나 아버님은 나이가 들어 친구들이 다 죽고 하나도 안 남아 꽤나 적적하더니 컴퓨터를 알게 된 후로는 여러 가지 새롭고 재미있는 세상을 쉽게 접할 수 있어 나날이 즐겁다고 하셨다. 컴퓨터가 생전에 알고 지냈던 세상 어느 친구보다도 더욱 맘에 꼭 맞는 귀한 친구라고 표현하셨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자손들이 몰려가 아버님 방을 정리했는데 "명화집"이라는 책이 나왔다. 책장을 넘기니 총천연색으로 프린트된 세계 각국의 미녀들이 온갖 포즈로 날 쳐다본다. 어쩜 그렇게 예술적인 사진들이 있을까. 감탄하며 보는 내게 아랫동서들이 다가와 들여다보더니 책을 훽 뺏아 쓰레기통에 던지면서 하는 말. "추해요 추해. 아버님이 이런 분인 줄 몰랐어요" 시아버님이 그런 바람둥이인줄 몰랐다는 말처럼 들린다. 개인적인 생각에 정답이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시아버님의 일기장도 3권이나 있었다. 장남은 아버님의 유물이라며 소중하게 간직하겠다 했다. 명화집도 있었는데 쓰레기통에 들어갔다는 내 말에 장남은 아깝다고 혀를 끌끌 찬다. 그렇게 아까워하는걸 보니 이사람 역시 명화집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에 웃음이 난다.

일기 내용 중 이런 말이 있었다. "내 나이 86세, 그러나 때로는 젊고 이쁜 여자들을 보면 꼭 껴안고 입 맞추고 싶다" .....추한 건 지, 측은한 건 지, 멋쟁이인 지, 동물인 지, 바람둥이인 지 개인적인 해석은 여러가지일 것이지만, 시아버님이 안고 입 맞추고 싶으신 건 그 젊은 여자들이 아니라 아버님의 지나간 젊은 청춘에 대해 입 맞추고 싶으셨던 것이리라.

우리도 가끔 풋풋한 바람만 불어도 그 바람이 마치 젊은 날을 지나온 그 시원했던 공기 같아서 감탄과 함께 마음속의 그리움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아버님도 그러셨을 것이다. 다만 대상이 다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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