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서 윗층에 사시는 교수님을 뵈었다. 운동복 차림인데 아침산보를 다녀오시는 길인 것 같다. 인사를 드리니 손을 내저으며 귀를 가리키신다. 보청기를 안 해서 듣기가 어렵다는 뜻인가 보다. 팔순이 넘으니 건강이 나빠져 한심하다고 한숨을 쉬신다.
교수님은 대학 강단에서 반생을 보내시며 저서도 많지만 특히 고전음악 들으며 독서하는 일이 유일한 취미셨다. 그런데 요즈음 그저 동네산보가 유일한 소일거리일 뿐, 보청기를 해도 귀가 어둡고 시력까지 나빠진 상태라 독서나 음악도 즐기지 못하신단다. 의사소통이 어려우니 보호자 없이는 외출이 어렵고 일상생활은 물론 부부간에도 의사소통이 쉽지 않아 불편하시다. 그분의 학문적인 업적을 생각할 때 노인 한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이 하나 없어진 것과 맞먹는다던 속담이 생각나서 안쓰럽고 불로초라도 구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면서 오랜 와병상태 중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떠오르고, 중풍 후유증으로 십 년째 힘들어하시는 구십 시어머니, 가끔씩 기운이 없으신 친정 어머니 등 내 주위 친척 어르신들의 미래의 모습들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아간다. 얼마나 여생을 더 보내실 수 있을까,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을까. 그리고 얼마 후 내 차례가 될 것이다. 세상을 얻은 솔로몬 왕도 세상을 헛되다했고 불로초를 구해오라 했다는 진시황의 그 안타까운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노인복지관의 회원관리 일로 최근 2년 이상 이용실적이 없는 회원들의 상태를 알아본 적이 있다. 이사, 병환, 사망 등으로 분류를 한 다음, 다시 오지 못할 회원들의 이름엔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내용을 삭제하는 일이다. 처음 회원 등록했을 당시에는 영어나 컴퓨터, 댄스도 배우는 등, 활기 있게 여생을 보냈을 그분들의 연락처, 학벌, 가족관계, 전직, 취미활동 수강과목이력 등을 일일이 삭제하면서 컴퓨터 속에서 살던 수 백 명 회원들을 내가 밖으로 날려 보낸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떤 어르신은 혈압 고지혈 약을 복용 중이고 보청기 없이는 듣지 못하신다. 백내장, 축농증, 임플란트, 척추수술, 무릎수술 등 웬만한 수술을 거의 다 받아 일상생활에 불편없이 살고는 있지만 자신이야말로 ‘인조인간’이 아니겠느냐고, 의학이 발달된 세상을 만나 고비를 잘 넘겨서 덤으로 살아있다고 하신다. 솔로몬 왕이나 진시황도 현세에 계셨다면 온갖 수술을 다 받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2백 살을 넘길 수가 있었을까.
시아버님은 팔십에 백내장 수술을 위해 종합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그곳이 감옥 같다고 하신 적이 있다. 누구는 폐암 형으로 누구는 위장병 형으로 각자 자기의 죗값을 등에 지고 들어와 침대를 하나씩 차지하고 고통을 치루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노년은 인생을 살아온 벌일까.
아기로 태어나서 세월 따라 청춘이 왔듯이 노경도 바라서 온 것이 아님에도 마음 한쪽이 슬퍼진다. 만물의 생로병사는 조물주가 정해준 인생의 과정이 아닌가. 나무가 열매에서 씨가 맺히고 땅에 떨어져 사계절을 따라 새싹이 나서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모두 떨어져 겨울을 맞이하면 나무는 제몫을 한 것이다. 누구든 맘대로 순서를 바꿀 수 없고 건너 뛸 수도 없다.
태어날 때 출생통, 진통의 과정을 거쳐야 어미의 몸에서 분리되어 세상구경을 할 수 있고 사춘기의 성장통을 거쳐야 성인이 될 수 있다. 짝을 만나 자손을 낳고 키우면서 인생의 쓴맛단맛을 보아야 중년고개를 넘어가고 회갑이 지나야 노인이 되는 것이다. 젊음은 아름답지만 늙음은 고귀하고 볼 수도 있다. 누구나 노인이 될 때까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월은 약, 세월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며 지혜가 그만큼 늘어간다는데, 위대한 나라는 젊은이들이 망치고 노인들이 회복시킨다는 말도 있는데 벌이라는 말에는 왠지 불편하다.
그렇다면 노화의 과정 또한 진도가 나간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조물주가 정해준 인생의 숙제를 잘 이루고 다음 과정으로 가려는 것이다. 출생통 성장통 성인통 뒤에 오는 노화통이다. 어느 과정이든 앞쪽 단계를 졸업해야 다음단계로 갈수가 있는 것이다.
노화통의 마무리는 언제든 이세상을 떠날 채비를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준비로 법정 스님은 누구나 빈손으로 세상에 왔듯이 애초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즉 비움, 용서, 이해, 자비라고 하신 글을 본적이 있다. 살아오는 동안 나도 모르게 쌓여진 물건들은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 글을 쓰면서 감정들까지 정리할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을 알았다.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듯이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는 것 또한 나이 들었다고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닌듯하다.
그러니 노화통은 슬퍼할 일이 아니고 자랑스러운 일 인 것이 분명하다. 고3때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하면 축하를 해주듯, 회사에 입사하여 과장 부장 그 이상으로 계속 승진, 다음 과정까지 잘 가기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으며 긴 세월 견디어왔는가. 노화통 역시 인생의 마무리를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다음 과정을 위해 몫을 충분히 해온 자신의 삶에 대해 열심히 마무리를 하는 중요한 과정을 감수하는 중이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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