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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자세히 알기

이예경 2016. 7. 4. 10:58

[공유] 만주족, 그들은 누구인가? (만주족의 역사와 문화)


숙신
BC 5세기 ~ 1세기 
당시 두만강 북부 ~ 연해주에 살던 퉁구스족을 뜻하는 말
반농 반수렵

읍루
1세기 ~ 6세기
퉁구스족 최초의 부족국가
숙신의 후예이자 말갈의 전신
3세기 후반 고구려를 침입했으나 실패

후한서의 읍루족에 대한 설명

부여인들과 생김새는 비슷했으나 언어가 달랐다.
오곡, 베, 붉은 옷, 담비 털을 생산했다.
군장은 없고 읍락수준의 촌장이 있었다.
삼림 속에 살고 땅을 파서 토굴을 짓고 살았다.
돼지를 기르고 돼지고기를 즐겨먹고 돼지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았다.
여름에는 벌거벗고 앞뒤를 베로 가린다. 
더럽고 냄새가 많이 나고 변소를 가운데 짓고 그 주위에 산다.
부여의 영향력 아래 있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많고 싸리나무로 활을 만들었다.
화살촉은 푸른 돌을 사용했는데 독을 발랐기 때문에 맞으면 즉사한다.
도둑질을 잘해 주위 나라에 근심거리다.
동이, 부여와는 달리 조두그릇을 사용하지 않는다.
법과 풍속의 기강이 없다. 


고구려에 복속
6세기 ~ 8세기
광개토왕 당시 고구려에 복속

발해에 복속
8세기 ~ 10세기
당시 말갈족은 피지배층으로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다

거란에 복속 
10세기 ~ 12세기 
일부는 고려로 흡수

금史에 보면 이때 고려에 복속되어 있었다고 쿨하게 인정하기도
고려는 여진족 회유 + 속민으로 삼아 영토확장 


금나라

1115년 완안아골타가 요나라 지배가 약화된 틈을 타 부족을 통합하고+ 발해인을 회유하여 금나라 건국

1125년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공, 멸망시킴 (송나라의 이이제이 + 역관광1탄)
고려에 군신의 예 요구 ->고려 동의하고 대신 의주 땅을 고려에 하사

1127년 송나라 카이펑 점령, 화북지역 점령
정강의 변 : 송휘종, 송흠종을 볼모로

이후 정착하면서 점차 유목 정체성 상실
한족과 혼인
남송과 평화정책
지배자들 유교이념 접수

1189년 몽골, 남송을 상대로 두개 전선에서 전쟁 (송나라의 이이제이 + 역관광 2탄)

1234년 애종의 자살, 금 멸망

맹안모극제 : 행정제도 (300호 1모극부, 10모극부 1맹안부) + 군사제도 (1모극부에서 100명 병사 징집)
여진족에게만 적용
화북 점령 후 치안유지를 위해 많은 여진족들 이주 -> 정부의 보호만 믿고 나태해짐
부흥운동에도 불구 약화, 한인과 토지를 둘러싼 분쟁격화로 이후 붕괴됨.


원나라에 복속
1230~1370
이런 과정을 거쳐 몽골, 투르크계와도 혼혈 됨

명나라에 복속
1370~17세기
정책적으로 만주에 정착시킴 :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

명의 기본원칙  
  • 여진족이 너무 강해도 약해도 안된다. 
  • “여진일만즉 천하불감당(여진족 만명이 뭉치면 처치곤란해진다)” + 이이제이(몽골을 견제)
  • 자치권은 주되, 강성한 세력이 일어나지 않게 통제
  • 생필품 ↔ 산삼·모피·진주 무역으로 경제의존↑


15세기 초 조선과는 당시 밀접한 사이

 

  • 이성계와 여진족 추장 이지란은 의형제 사이
  • 조선 초기 조사의 난, 이징옥 난에서 여진족을 반란에 동참시킨 점
  • 당시 조선사람들은 여진족을 두고 '무좀같은 X'이라고 비하하기도

 


누르하치 : 재력을 통해 군사력 증진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의 견제가 약화된 틈을 타서 세력 확장 
여진 대신에 만주라는 명칭을 사용 ('문수보살'이 만주의 어원이라는 썰)
청나라 건국 (1616년)


청나라  :여기서는 만주족의 사회, 문화에 대해서만 다룬다

● 근현대까지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민족이었으나 현재는 사실상 한족에 흡수소멸됐다.
영토를 크게 늘려주고 사라졌으니 한족들에게는 정말 고마운 민족

● 1000만명 정도가 현재 있다고 하나 정확한 수치가 아니다. 
애초에 만주족으로 인정받는 기준이 되는 팔기군에 한족도 상당수가 있었으니...

● 야만적인 이미지가 강하나 수준 높은 불교 문화와 고유의 문자까지 가졌던 준 문명 부족이었다. 

● 만주어는 현대 중국어(만다린)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다.


● 치파오변발 등 현재 중국 전통이라 생각되는 복식과 풍습은 만주고유의 방식이다.

 성씨(姓氏)가 특이한데, 큰 범위의 성씨와 작은 범위의 성씨가 조합된 성씨를 사용했다.

● 만주족의 주식은 찐만두.

●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은 개고기를 먹지만 만주족은 먹지 않는다.
누르하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가 구해줬다는 전설 때문에

● 만주족과 한족과의 결혼은 제한됐다.
한족의 인구는 만주족보다 100배 이상 많았기 때문에 만주족은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한족에 동화되는 것을 경계하여 관학을 세워 만주어를 가르치고 관리등용 시험 때도 만주어를 장려했다. 
특히 만주인이 문관이 되려면 반드시 만주어와 몽골어의 번역 시험을 봐야했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만주족의 한족으로의 동화는 막을수가 없었다.

● 역대 다른 이민족 왕조들과는 달리 청나라는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강조한 다민족 국가를 지향했다.

● 만주족 황실이 본거지를 중국으로 옮긴 이후에도 
만주지방에는 계속 만주족들이 전통 생활 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았다.

● 특히 만주에 계속 남은 귀족들은 청 황실의 우대정책 덕택에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

● 만주족 유랑민 중 조선으로 건너가 눌러앉은 경우도 있었으나 주로 하층민으로서 사당패 같은 일을 했다.

● 여진족 시절과는 달리 청나라에 와서는 만주족의 약탈은 없어졌다.

 만주 지역은 봉금정책 때문에 타민족들이 들어와 살 수 없었다.
혹시나 한족의 반란으로 위협을 받으면 최후의 보루로 생각했던 곳이 만주였으니

 하지만 러시아가 만주로 야금야금 세력을 확장하던 터라 봉금령을 풀었는데
곧바로 기근에 허덕이던 중국인(주로 산둥지방)들이 미칠듯이 만주로 러시했다.
수십만에 불과했던 만주 전역의 인구가 삽시간에 천만명을 훌쩍 넘게 되었다. 
 
 이 당시 평생 놀고 먹기만 하던 만주 귀족들은 한족들에게 땅을 임대해주면서 지주로 생활했다.

 만주국 시절 이들 만주의 한인들은 3등시민 취급을 받았지만 강제이주는 없었고
중국이 건국되면서 확고한 주도권을 쥐게 됨.

● 청조말 태평천국운동신해혁명 당시 한인에 의해 많은 만주족이 희생됐다.

 이 때 한족에게 분노한 만주족은 일본과 손을 잡고 만주사변만주국 설립에 앞장선다.

 이러한 친일매국행위 때문에 문화대혁명때 만주족은 대차게 까였다

● 혁명파와 국민당에 대한 반감 때문에 국공내전 당시 만주족들은 공산당의 편에서 싸웠다. 
공산당이 내건 평등 슬로건(민족주의가 아닌)도 한 몫

● 유전학상 한국인과 가장 비슷한 민족이 만주족이다.
부계 유전인 Y염색체 하플로그룹, 모계 유전인 미토콘드리아 하플로그룹 모두 한국인과 가장 유사함

● 한국인과 만주족은 역사적으로 2천년 전부터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갖고 따로 따로 살았다.

● 만주어로 한국을 솔호(Solho)라고 한다. 몽골어로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르는데, 이와 관련이 있을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