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만주족, 그들은 누구인가? (만주족의 역사와 문화)
숙신
BC 5세기 ~ 1세기
당시 두만강 북부 ~ 연해주에 살던 퉁구스족을 뜻하는 말
반농 반수렵
읍루
1세기 ~ 6세기
퉁구스족 최초의 부족국가
숙신의 후예이자 말갈의 전신
3세기 후반 고구려를 침입했으나 실패
후한서의 읍루족에 대한 설명
① 부여인들과 생김새는 비슷했으나 언어가 달랐다.
② 오곡, 베, 붉은 옷, 담비 털을 생산했다.
③ 군장은 없고 읍락수준의 촌장이 있었다.
④ 삼림 속에 살고 땅을 파서 토굴을 짓고 살았다.
⑤ 돼지를 기르고 돼지고기를 즐겨먹고 돼지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⑥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았다.
⑦ 여름에는 벌거벗고 앞뒤를 베로 가린다.
⑧ 더럽고 냄새가 많이 나고 변소를 가운데 짓고 그 주위에 산다.
⑨ 부여의 영향력 아래 있다.
⑩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많고 싸리나무로 활을 만들었다.
⑪ 화살촉은 푸른 돌을 사용했는데 독을 발랐기 때문에 맞으면 즉사한다.
⑫ 도둑질을 잘해 주위 나라에 근심거리다.
⑬ 동이, 부여와는 달리 조두그릇을 사용하지 않는다.
⑭ 법과 풍속의 기강이 없다.
고구려에 복속
6세기 ~ 8세기
광개토왕 당시 고구려에 복속
발해에 복속
8세기 ~ 10세기
당시 말갈족은 피지배층으로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다
거란에 복속
10세기 ~ 12세기
일부는 고려로 흡수
금史에 보면 이때 고려에 복속되어 있었다고 쿨하게 인정하기도
고려는 여진족 회유 + 속민으로 삼아 영토확장
금나라
1125년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공, 멸망시킴 (송나라의 이이제이 + 역관광1탄)
고려에 군신의 예 요구 ->고려 동의하고 대신 의주 땅을 고려에 하사
정강의 변 : 송휘종, 송흠종을 볼모로
이후 정착하면서 점차 유목 정체성 상실
한족과 혼인
남송과 평화정책
지배자들 유교이념 접수
1189년 몽골, 남송을 상대로 두개 전선에서 전쟁 (송나라의 이이제이 + 역관광 2탄)
맹안모극제 : 행정제도 (300호 1모극부, 10모극부 1맹안부) + 군사제도 (1모극부에서 100명 병사 징집)
여진족에게만 적용
화북 점령 후 치안유지를 위해 많은 여진족들 이주 -> 정부의 보호만 믿고 나태해짐
부흥운동에도 불구 약화, 한인과 토지를 둘러싼 분쟁격화로 이후 붕괴됨.
원나라에 복속
1230~1370
이런 과정을 거쳐 몽골, 투르크계와도 혼혈 됨
명나라에 복속
1370~17세기
명의 기본원칙
- 여진족이 너무 강해도 약해도 안된다.
- “여진일만즉 천하불감당(여진족 만명이 뭉치면 처치곤란해진다)” + 이이제이(몽골을 견제)
- 자치권은 주되, 강성한 세력이 일어나지 않게 통제
- 생필품 ↔ 산삼·모피·진주 무역으로 경제의존↑
15세기 초 조선과는 당시 밀접한 사이
- 이성계와 여진족 추장 이지란은 의형제 사이
- 조선 초기 조사의 난, 이징옥 난에서 여진족을 반란에 동참시킨 점
- 당시 조선사람들은 여진족을 두고 '무좀같은 X'이라고 비하하기도
누르하치 : 재력을 통해 군사력 증진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의 견제가 약화된 틈을 타서 세력 확장
청나라 건국 (1616년)
청나라 :여기서는 만주족의 사회, 문화에 대해서만 다룬다
● 근현대까지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민족이었으나 현재는 사실상 한족에 흡수소멸됐다.
영토를 크게 늘려주고 사라졌으니 한족들에게는 정말 고마운 민족
● 1000만명 정도가 현재 있다고 하나 정확한 수치가 아니다.
애초에 만주족으로 인정받는 기준이 되는 팔기군에 한족도 상당수가 있었으니...
● 야만적인 이미지가 강하나 수준 높은 불교 문화와 고유의 문자까지 가졌던 준 문명 부족이었다.
● 만주어는 현대 중국어(만다린)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다.
● 성씨(姓氏)가 특이한데, 큰 범위의 성씨와 작은 범위의 성씨가 조합된 성씨를 사용했다.
●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은 개고기를 먹지만 만주족은 먹지 않는다.
누르하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가 구해줬다는 전설 때문에
● 만주족과 한족과의 결혼은 제한됐다.
한족의 인구는 만주족보다 100배 이상 많았기 때문에 만주족은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 한족에 동화되는 것을 경계하여 관학을 세워 만주어를 가르치고 관리등용 시험 때도 만주어를 장려했다.
특히 만주인이 문관이 되려면 반드시 만주어와 몽골어의 번역 시험을 봐야했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만주족의 한족으로의 동화는 막을수가 없었다.
● 역대 다른 이민족 왕조들과는 달리 청나라는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강조한 다민족 국가를 지향했다.
● 만주족 황실이 본거지를 중국으로 옮긴 이후에도
만주지방에는 계속 만주족들이 전통 생활 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았다.
● 특히 만주에 계속 남은 귀족들은 청 황실의 우대정책 덕택에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
● 만주족 유랑민 중 조선으로 건너가 눌러앉은 경우도 있었으나 주로 하층민으로서 사당패 같은 일을 했다.
● 여진족 시절과는 달리 청나라에 와서는 만주족의 약탈은 없어졌다.
혹시나 한족의 반란으로 위협을 받으면 최후의 보루로 생각했던 곳이 만주였으니
● 하지만 러시아가 만주로 야금야금 세력을 확장하던 터라 봉금령을 풀었는데
곧바로 기근에 허덕이던 중국인(주로 산둥지방)들이 미칠듯이 만주로 러시했다.
수십만에 불과했던 만주 전역의 인구가 삽시간에 천만명을 훌쩍 넘게 되었다.
● 이 당시 평생 놀고 먹기만 하던 만주 귀족들은 한족들에게 땅을 임대해주면서 지주로 생활했다.
● 만주국 시절 이들 만주의 한인들은 3등시민 취급을 받았지만 강제이주는 없었고
중국이 건국되면서 확고한 주도권을 쥐게 됨.
● 혁명파와 국민당에 대한 반감 때문에 국공내전 당시 만주족들은 공산당의 편에서 싸웠다.
공산당이 내건 평등 슬로건(민족주의가 아닌)도 한 몫
● 유전학상 한국인과 가장 비슷한 민족이 만주족이다.
부계 유전인 Y염색체 하플로그룹, 모계 유전인 미토콘드리아 하플로그룹 모두 한국인과 가장 유사함
● 한국인과 만주족은 역사적으로 2천년 전부터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갖고 따로 따로 살았다.
● 만주어로 한국을 솔호(Solho)라고 한다. 몽골어로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르는데, 이와 관련이 있을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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