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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껸체조 - 택견의 유래, 역사, 특징

이예경 2012. 12. 17. 22:13

 

http://youtu.be/sB8Qw5ZgwyI

 

명칭

 

택견의 어의(語義)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조완묵(趙琓默)은 향기(鄕技)를 뜻하는 신라어로 추정하였다.

 ≪고려사≫에는 택견을 수박(手搏) 또는 수박희(手搏戱)라 기록하였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수박(手拍)이라고도 썼다.

 최남선(崔南善)은 ≪조선상식≫ 풍속편에서 "예전에 변(··卞)이라 하였고

뒤에 권(拳)이라 한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수박(手搏·手拍) 또는 수벽(手擘)이라고 쓰고 있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헌인 ≪재물보(才物譜)≫·≪해동죽지(海東竹枝)≫·≪청구영언(靑丘永言)≫ 등에는

탁견(托肩)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그밖에 주로 발을 많이 쓰기 때문에 각희(角戱)라는 호칭도 있다.

이와 같이 택견에 대한 표기가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문헌 기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택견을 한자로 탁견(托肩)이라고 이두(吏讀)로 차자(借字) 표기한 것을

 훈민정음 반포 후에 한자음 그대로 음독하여 '탁견'이라고 표기하였고,

이것이 구전되면서 덕견·택견·태껸 등으로 표기하였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일반 민간에서 구전되던 발음은 '택견'으로서, 이 낱말은 ≪조선어대사전≫(1920)에 수록되었고,

 안확(安廓, 1881∼1946)의 ≪조선무사영웅전≫에도 택견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말의 선교사 스튜어트 큘린(Stewart Culin)이 펴낸 ≪조선의 놀이(Korean Games)≫(1895)에도

 'HTAIK-KYEN-HA-KI―kiking'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1933년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는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택견을 태껸으로 표기하여 한동안 국어사전에는 태껸만이 수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택견으로 표기하고 있다.

역사

택견은 일찍이 우리 선인들의 생활 속에서 발생하여 발달 전승된 기예로서,

고조선이래 삼국시대에는 제천의식과 같은 부족공동체 행사에서 행해졌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무인들의 무예종목으로, 조선시대에는 세시풍속의 민중오락경기로 행해져 왔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취도 없이 사라질 상태에까지 이르렀으나, 몇몇 전수자들에 의하여 명맥이 간신히 유지, 계승되어 오다가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됨으로써 원형이 보전되기에 이르렀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택견을 하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고구려 무용총(舞踊塚)과 삼실총(三室塚) 등 고분의 벽화 중에 택견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택견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에 체계화한 택견은

고려시대에 와서 무술로서 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무인들 사이에서 무예로 성행하게 되었다.

 

≪고려사≫에는 택견을 수박 또는 수박희(手搏戱)라 하였는데,

 당시 고려사회에서는 왕과 귀족들이 관람할만한 가치가 있는 무술경기로 즐겼다.

 힘이 센 자들에게 수박희를 시켜서 이긴 자에게는 상으로 무인 벼슬을 내리거나

 병사들 가운데 수박을 잘하면 승진시켜주는 등 수박희를 무술로서 장려하였다.

 

고려시대에 무인사회에서 성행한 수박희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대중화한 경기로 퍼져서

 무인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널리 행하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산군(礪山郡) 풍속조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수박희가 민속놀이로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 말엽의 화가 유숙(劉淑:1827∼1873)의 <대쾌도(大快圖)>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택견이 민중의 오락행사로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택견이 민간으로 퍼져서 대중화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무과 시험과목 중에 택견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전통편(大典通編)≫ 병전(兵典)에 택견이 관무재초시(觀武才初試) 과목에 들어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수박희를 겨루게 하여 3명을 이긴 자를 방패군(防牌軍)에 채용하고,

나라에서 수박희로써 시험하여 인재를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용재총화(·齋叢話)≫의 어함종(魚咸從)에 대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항간에서도 택견이 매우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정조 때 찬집, 간행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권법이 실려 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던 택견(수박)방식에 따라 자세와 동작과 총보(總譜)를 재편성해 놓았다.

≪해동죽지≫에 택견은 신통한 비각술(飛脚術)이라 가볍게 뛰어서 상투와 비녀를 스쳐간다고 하였다.

 

한편 최남선은 ≪조선상식≫ 풍속편에서 "택견은 본래 무예의 일종이었으나

차츰 술자리의 여흥이 되고 아동들의 놀이로 변화하였다."고 기술하였으며,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에서 "조선에는 이조(李朝)에서 무풍(武風)을 천시한 이래로

 그(택견) 자취가 거의 전멸하니라."고 한 바와 같이 한때 택견은 거의 인멸(湮滅)상태에 이르렀다.

 

 1800년대에는 왕십리 택견의 명인 박털백, 구리개 택견의 명인 박무경, 종로 택견의 명인 임호(林虎:1882∼·) 등에 의하여

 택견이 계승되었다. 이때 서울의 택견꾼을 윗대패와 아랫대패로 나누었는데, 성안에 사는 패를 윗대패, 성밖에 사는 패를 아랫대패라고 하였다. 성안에 사는 패끼리도 대궐에 가까운 쪽이 윗대패가 되고 대궐에서 먼 곳이 아랫대패가 되었다. 윗대패에는 종로 택견의 임호 등이 있었고, 아랫대패에는 왕십리 택견의 신재영(辛在榮:1881∼1948)·이경천(李敬天:1904∼1985)과 구리개 택견의 김홍식(金弘植:1892∼1985) 등이 있었다.

 

그뒤 윗대패의 송덕기(宋德基:1893∼1987)는 12세부터 필운동에 살던 임호로부터 택견을 배우기 시작하여

 20세에는 마을대항 택견경기에 참가하였다. 신한승(辛漢承:이명 辛丞, 1928∼1987)은 13세부터 종조부(從祖父)인 신재영에게 택견을 배우고 1970년에는 송덕기를 사사하여 전수를 받는 한편, 김홍식과 이경천으로부터도 기술을 배웠다.

 

택견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한승은 정경화(鄭景和)·박만엽(朴萬燁)·양만하(梁萬河) 등 후계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택견의 원형을 재구현하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은 택견을 보전, 발전시키기 위하여 1977년 택견동인회를 발족하고

그뒤 한국전통택견계승회로 개칭하였다가 1988년 한국전통택견회를 창립하고 1999년 사단법인 한국전통택견회로 등록하였다.

 

 한편 송덕기에게 택견을 배운 도기현(都基鉉)은 1983년 택견계승회 창립을 주도하고 1992년 중앙전수관을 개관하였으며,

 1996년 사단법인 우리무예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또한 송덕기·신한승으로부터 택견을 전수받은 이용복(李容福)은

1984년 한국전통택견연구회를 결성하고 1991년 사단법인 대한택견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신한승으로부터 전통택견을 전수받은 김영철(金榮喆)은 이성철(李成喆) 등 많은 사범을 배출하는 한편 안학현(安學鉉)으로부터 전수받은 노들태껸을 체계화하여 1993년 사회단체 노들태껸보전회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이 택견은 여러 후계자들에 의하여 보전, 계승, 중흥되어 민족문화의 하나로 자리잡고 세계로 전파되어 가고 있다.

 

1983년 6월 1일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송덕기·신한승이 택견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87년에 기능보유자가 모두 타계하여 공석이었다가, 1996년 정경화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73년 충청북도 충주시 교현동에 택견전수관(도장)이 개설된 다음 시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97년 충주시 호암동 호암공원내에 택견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중앙도장 한국전통택견총전수관을 건립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97년 제1회 전국택견대회를 개최한 이래 2000년 6월에 제4회 대회를 열었다.

실제방법

택견의 실제방법은 서기택견과 결련(結連)택견으로 나눌 수 있다.
(1) 서기택견:활수(活數) 즉 방어를 중심으로 한 택견으로서 경기규칙에 따라 맞서기(겨루기)를 하는 것이다. 즉 신체단련을 위한 체육적인 동작이며 주먹질이나 급소 공격이 배제된 경기화한 택견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주로 놀이 또는 민중의 오락행사로 행해졌는데, 현재 문화재택견의 전수체계가 서기택견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서기택견은 품(品)밟기, 활갯짓, 발질의 모양새(型態)로 짜여져 있으며, 수련방법에는 혼자 익히기, 마주 메기기, 견주기 등 3단계의 순서가 있다.


(2) 결련택견:예전에 무인들의 무예로 행해졌던 실전기예로서 격투기술을 행하는 공격중심의 격렬한 무술이다. 결련태견의 싸움수는 공격위주의 살수(殺數)로서 이 기술을 잘못 쓰면 위험하기 때문에 비법(秘法)으로 전해져 오늘날에는 12가지 정도만 전할 뿐이다. 현재는 유단자에 한하여 수련할 수 있는 과정이다.

경기규칙

각 택견단체가 주최 주관하는 경기대회를 동일하게 운영하고 공정하게 심판하기 위하여

사단법인 한국전통택견회가 제정한 경기규칙은 다음과 같다.
(1) 경기장:반지름 5m 이상의 원으로 하고, 경기장에는 득점판, 계시기, 징 또는 북, 청· 홍색 띠 각 4쌍 등을 갖춘다.
(2) 복장:선수의 복장은 흰색 우리 옷(중의적삼)을 착용한다.
(3) 심판원:심판위원회의 감독 아래 주심 1명과 부심 2명이 주관한다. 주심은 경기장내에 머물면서 경기를 진행 판정하고, 부심은 경기장 밖에서 서로 대각으로 위치하여 주심을 보조한다.
(4) 경기준수사항:경기는 경기장내에서만 하며, 어떠한 기술이라도 장외(한 선수의 발이 장외를 디뎠을 때)에서 시도하는 것은 무효이다. 그러나 경기종료신호와 동시에 시도한 기술의 결과는 인정한다.
(5) 경기시간:경기시간의 시작과 종료는 징이나 북 등으로 알린다. 매 경기 한 판을 2분으 로 하며, 휴식시간은 2분으로 한다. 단 주심의 "서거라!"로부터 "섰다!"까지의 경과시간, 또는 "멈춰!"로부터 "계속!"까지의 시간은 경기시간에 포함하지 않는다.
(6) 경기종목:대걸이·맞서기·본때뵈기로 하며, 각 종목마다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구분하는데, 이를 체급별로 구분할 수 있다.

특징

택견은 우리의 생활과 함께 해온 무술로 생활 그 자체가 곧 택견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 선조들의 생활 동작이나 어린이의 놀이 동작이 택견의 기본동작이 된 것이다.

태권도는 동작이 딱딱하고 억세며 동작의 기본을 직선에 두고 맺고 끊는 것이 자르듯 명확하지만,

택견은 동작의 기본을 곡선에 두고 있어 몸짓이 섬세하고 부드럽다.

또 태권도에는 공격과 방어의 모양새를 갖춘 일정한 형이라는 것이 있지만

택견에는 정해진 틀이 없고 기술구조가 맞서기(겨루기, 견주기) 위주로 되어 있다.

 택견은 중국 권법처럼 동작을 길게 흐르게 하지 않으며, 일본의 가라테(唐手)처럼 절도있게 짧게 끊지도 않는다.

또한 중국처럼 동물을 흉내 내지도 않으며 일본처럼 인정없이 무조건 질러대지도 않는다.

또 중국 권법에서 많이 쓰는 주먹을 쓰지 않는 대신 편 손으로 손바닥이나 손아귀로 밀거나 후려치고 낚아채며 공격하고 방어한다.

 

특히 세 박자의 탄력에 바탕을 두고 손·발이 척척 맞으며

회전할 때 생기는 힘을 이용하면 엄청난 파괴력이 생겨 힘 안 들이고 손쉽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즉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지며, 단순한 자세로 멈추어 있지도 않고 정(靜)에서 동(動)으로 삽시간에 변환할 수 있다.

 

 택견의 기본이 되는 묘수는 단순한 듯하지만 기본기만 잘 수련하면

몸의 어느 방향에서도 응용기(應用技)를 구사할 수 있는 변화무궁한 운동이다.

또한 품밟기·활갯짓·발질의 독특한 몸놀림으로 상대의 타격점을 흩트러 놓아 공격의 기세를 둔화시키는 한편,

몸을 굼실댐으로써 충격을 완화시켜 자기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호신의 무술이기도 하다.

정신

택견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함축된 선인들의 지혜와 경험이 내재되어 있고

고유문화 속에서 형성된 사상이 함장(陷藏)되어 있는 우리의 전통문화이다.

우리 조상의 생활의 흔적과 혼이 담겨 있기에 기술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을 더 중시하였다.

 택견이 오랜 역사 속에서 현재까지 맥이 끊기지 않고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외공(外空)적인 기술보다는 내공(內空)적인 정신의 힘을 더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택견의 수련과정은 제1단계는 기술의 수련이며,

제2단계는 정신수련으로 차원을 높인다.

따라서 단순히 신체의 단련이나 격투기술의 전수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완성으로 가는 참된 정신수련이 요구된다.

택견의 정신은 고구려의 선배정신과 신라의 화랑정신, 고려의 호국정신과 조선의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의 정신을 실현해 나가는 것으로 전통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민족주체성을 고취시킨다.

 

또 우리의 무예가 다 그러하듯 택견도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나므로 전통의 미덕인 겸양을 중시한다.

그리하여 택견인이 가야 할 길은 택견으로 조상의 얼을 이어 마음을 닦고 예를 지키고 견주며

강인한 몸을 길러 겨레와 나라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출처

한국사기초사전, 2011,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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