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에 새해를 맞이 하는 마음.
아주 오래전에
친정 어머님은 건강이 안 좋았던 남편이 한국을 방문 하였을때
“80 평생을 살아보니 인생이 별것 아니네. 너무 애쓰지 말게” 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50세도 되지않은 나는 그 말씀을 헤아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믐날 밤을 지새이고 나면 여느날같이 다음날이 새해인것을
나는 새해가 되면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수 있을듯이 그 꿈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마음이란 내 몸속에 내가 부듬어 안고 살고 있지만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도 않거늘
남편과 자식들까지도 내 희망사항에 올려 놓았습니다.
80세가 되어서야 어머님의 말씀이 조금은 와닿기 때문일까?
태어난 나 그대로를 부모님께서 한평생을 변함없이 사랑해주셨듯이
나도
내 자신과 가족들을 또 친구들까지도 타고난 그대로를 사랑해 보려고 합니다.
고무줄을 낀 바지가 나이들어 가면서 불어나는 뱃살을 감싸 주듯이
마음도 조금씩 늘어나다 보면
모두를 편안하게 감싸주고 덮으면서 지낼수가 있을듯 하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노년의 어머니의 얼굴과 마추치게 되어 깜짝 놀란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온몸 구석구석에는 흘러가 버린줄만 알았던 긴 세월이 몽실몽실 하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옛날의 젊은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써 보기도 했지만
80세의 이 모습이 될때까지
나와 친구되어 나를 지켜주고 붙들어 주며 나와 함께 흘러간 긴 세월을 고마워 하며
이대로 조용히 새해를 맞이 합니다.
친정 아버님은 집안이 늘 빈틈없이 정돈 되어 있어야 마음이 편한분이셨습니다.
전기불이 나가서 집안이 캄캄해져도
손쉽게 물건을 찾을수 있도록 모든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셨기에
한옥에서 여섯 남매를 기르시던 어머님께서는 늘 힘들어 하셨습니다.
정원에 새로 심은 나무도 밤새 동안에 제 자리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드시면
다음날로 옮겨 심으셔야 직성이 풀리셨기에
일꾼들의 점심상, 술상을 준비 하셔야 했던 어머님은
뿌리박을 시간도 없는 나무들이 “몸살”을 앓겠다고 동정까지 하셨습니다.
딸이 없는 나는 맏아들이 결혼할때
나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며느리가 뒷 처리를 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에
나와 남편의 내복등이 들은 옷장속은 그야말로 아버님의 희망사항이 되였습니다.
상하의 내복들을 거의 같은 size 로 접어서 백화점 진열장같이 차곡차곡 넣어 놓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중학교때 부터 혼자서 유학 시절을 보낸 남편은 전혀 딴세상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은 한번 꺼내서 입었던것은 미국 축구공같이 둘둘 말아서 공 던지듯 턱턱 집어넣곤 했습니다.
그럴때마다 곱지않은 표정의 내 얼굴이 남편을 향하곤 했습니다.
철없는 내 나이 스무살에 남편과 생의 동반자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두 아들들이 자기 아빠가 엄마와 약혼을한 철부지의 나이 스물한살이 되었을때마다
내 마음이 철렁 가라앉고는 했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남편은
나에겐 서투르고 생소하기만 했던 미국생활에서
나와 자식들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의 그릇만큼만 채우고
쓸데없는 욕심으로 그릇을 넘쳐 흐르는 세속적인 삶에 한눈을 팔지않고
지성인으로서
조용히 자기의 갈길을 가도록 앞장을 서서 그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길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 자식들과 또 그들의 자식들이
제가 받은 80세의 소중하고 귀한 선물입니다.
우리들의 행복이란
마음을 움직이거나 큰것에서만 오는것이 아니기에
늘 내옆에 소리없이 숨어있는 작은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언제인가는 남편이 둘둘말은 옷들을 던질 기력조차 없을때가 오겠기에
머나먼길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동행해준 남편을 생각하며
새해에도 여전히 옷들을 접어 넣으려고 합니다.
우리집 근처에 사는 두 아들들의 서재는
문이 열려 있으면 나는 눈길을 돌리고 못본척하고 지나갔습니다.
책상위는 말할것도 없고 방바닥에 발드리밀 자리가 없이 종이들이 깔려 있어
손님들이 오시면 문을 닫아야 하는 남편의 서재를 보는듯하여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내탓인양 늘 며느리들에게 미안해 하곤 했습니다.
50대 중반에 들어서는 아들들의 머리가 흰머리카락으로 희끗희끗 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걸어온길을 자기들도 뒤따라 오건만
엄마 마음에는 왜 이리 걸리는지
자식들의 머리를 볼때마다 제 마음은 찡하기만 합니다.
사랑은 집착이 아니고 강물같이 조용히 흘러가는것입니다.
언제인가는 자식들에게도
그들이 일을 하던 서재가 지난날의 젊음의 공간으로 애타게 그리워 할때가 올것이기에
중년의 자식들을 탓하려 했던 내 미련함을 인제야 뉘우치며
자식들의 삶이 담긴 서재도 소리없이 지나치려고 합니다.
몇년전에 넓은집에서 단층의 좁은 공간으로 이사를 할때는
몇십년동안 끼고 살았던 물건들을 없애는것만이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학위를 받았을때 멀리서 시부모님께서 선물로 보내주신 “죽림칠현”의 골동품 병풍은
아들을 어렸을때 멀리 떠내 보내신 시부모님의 아픈 사랑과 그리움을 품고 있었다는것을
내 집에서 그 병풍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사랑도 그리움도
언제인가는 떠나보내야 될때가 오면
조용히 마음속 깊은곳에 묻으려고 합니다.
세상떠난 친구를 그렇게 묻었습니다.
매년 여름방학이면
바쁜 부모들을 위해서 손녀딸들만 데리고 여행을 많이 하였습니다.
명절이 오면 생일이 오면 인제는 대학생이된 손녀딸들이 방학에 집에오면
참으로 음식들도 많이 해맥였습니다.
자기들이 보내주는 카드마다 무럭무럭 김이 나는 음식 그림이 있는것을 보면
언제인가는 손녀딸들이 어머니가 되어 할머니가 되어
예전에 맛있었던 할머니의 음식들은
할머니의 손맛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는것을 깨닫는날이 오겠거니
할머니의 소박한 꿈이 되었습니다.
가을은 매년 잊지않고 찾아오고
가로수에 그림처럼 펼쳐진 낙엽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tunnel 이 되어
그 속을 운전해 가는것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였습니다.
80이 되어서 바라보는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벼랑끝에 매달린 낙엽들의 애잔한 마음이 인제서야 전해지기 때문일까?
아름다운 가을의 모습에도 서글픔이 조금씩 그림자가 되어 비추기 시작하고
낙엽들을 밟는 바스락 소리가 조용히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뒤따라 다가오는 겨울을 바라보는 마음에도 조금씩 살얼음이 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때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명과 함께
삶을 지켜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그 여린 애기손에 꼭 쥐여진채로 태어났습니다.
비바람 견디어내며 안간힘을 다해서 끝까지 버티고 있던 낙엽처럼
80 여년을 버티고 살아온 삶은 아무리 행복하고 평탄한 삶일지라도
그 삶을 등에 업고 여기까지 걸어 오기까지는
참으로 무거웠던 짐이였고 힘들었던 길이었습니다.
박완서씨의 어느 글에서는 자기가 허리를 다치고 보니
하늘을 나르고 바다위를 걷는것만이 기적이 아니고
두 어깨를 활짝 펴고 걸어 다닐수있는것 만도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80이 될때까지
때로는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오뚜기 같이 발딱 다시 일어나서
열심히 자기 삶을 지켜온것은
참으로 대단하고 칭찬 받을 일이며 기적이라고도 생각이됩니다.
남들보다 별로 특별한 삶도 아닌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평범한 삶에서 오는 잔잔한 행복함이
소중한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친정 어머님께서는 저를 멀리 미국으로 떠내 보내시면서 늘 밑을 내려다 보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위를 올려다 보면 서있는 내 자리가 늘 부족해 보여서 불안하지만
밑을 내려다 보면 내 자리가 얼마나 축복받은 소중한 자리라는것을 알게되어
매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내 자리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흔들때마다 어머님의 이 말씀이 나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태어날때도 떠날때도 우리는 혼자입니다.
외로움은 허허벌판에 혼자 서있는 두려움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혼자서 바라볼수 있는 조용한 시간이고 공간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살고 있지만
나만의 공간을 마음속 깊은속에 숨겨두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속에서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돌리다 보면 마음속을 비우기가 수월해지고
지난일을 후회하는 버릇을 버리는것도
미련을 털어 버리는것도 또 무거운 욕심을 내려 놓는것까지도
점점 수월해 진다는것을
부끄러운 이 나이가 되면서야 조금씩 알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속을 비우다 보면 이렇게나 편안하고 가벼운것을
그래서 나만의 이 공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또 기도 드리는 마음으로 채워 가려고 합니다.
80이 되는 새해에는
걸어가는 발걸음은 힘이없고 느리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뒤돌아 보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위해 조용히 걸어가려고 합니다.
2018년 12월
와싱톤에서
명자언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