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62 야유회 --- 소수 서원
2016년10월11일(화) 경상북도 영주
음악 감상 --- "七弦淸音"
소수 서원 입구의 소나무 ( 赤松 ) 숲 길 --- 학자수 ( 學者樹 )
학자수 안의 돌 둔덕 --- 영귀봉 ( 靈龜峯 )
수령 500 년의 은행 나무 --- 영주 시 보호수 ( 고유 번호 11-28-7 )
소수 서원 입구의 옆으로 물이 흐르는 연못 죽계수 ( 竹溪水 )
소수 서원 옆으로 바라보는 죽계수 ( 竹溪水 ) 의 시냇물
소수 서원의 전문 Guide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소수 서원 ( 紹修 書院 ) 은 1543 년에 풍기 군수 주세붕 ( 周世鵬 ) 이 백운동 서원 ( 白雲洞 書院 ) 을 창건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경렴정 ( 景濂亭 ) 은 죽계수를 바라보며 학문을 이야기 하던 곳으로서 초서의 대가 황기로 ( 黃嗜老 ) 가 쓴 현판이 남아 있다
지도문 ( 志道門 ) 을 통하여 서원으로 들어간다
소수 서원의 원래의 이름은 백운동 서원 ( 白雲洞 書院 ) 이었다
소수 서원 안의 건물 배치
소수 서원 안의 건물들은 크게 강학 영역 ( 講學 領域 ) 과 제향 영역
( 祭享 領域 ) 으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강학 영역은 학문을 배우고 닦던 공간으로서, 이 영역 안에는 강학당
( 講學堂 ), 지락재 ( 至樂齎 ) 와 학구재 ( 學求齎 ), 일신재
( 日新齎 ) 와 직방재 ( 直方齎 ), 그리고 장서각 ( 藏書閣 ) 이 있다.
이 건물들의 배치는 학문의 단계의 순서대로 하였다고 한다. 제일 첫
단계는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뜻하는 지락재이며, 다음으로는
성현의 길을 따라서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그리고 깨어 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의 순서대로이며,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이 크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 ( 明倫堂 ) 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고 한다.
강학당 ( 講學堂 ) 은 보물 제 1403 호로 등록되어 있다.
지락재 ( 至樂齎 ) 와 학구재 ( 學求齎 )
학구재 ( 學求齎 )
직방재 ( 直方齎 )
장서각 ( 藏書閣 )
제향 영역 ( 祭享 領域 ) 안의 영정각 ( 影幀閣 )
소수 서원 안의 제향 영역 ( 祭享 領域 ) 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서,
이 영역 안에는 문성공묘 ( 文成公廟 ), 전사청 ( 典祀廳 ) 및 영정각
( 影幀閣 ) 등의 건물이 있다.
문성공묘 ( 文成公廟 ) 는 고려 때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 출신의
학자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문성공 ( 文成公 ) 회헌
( 晦軒 ) 안향 ( 安珦 ; 1243 ~ 1306 ) 의 위패를 안치한 사묘 ( 祠廟 )
로서, 1542 년에 풍기 군수 주세붕 ( 周世鵬 ) 이 세웠으며, 현재
보물 제 1402 호로 등록되어 있다.
문성공묘에서는 매년 봄, 가을로 두 번의 제를 지낸다고 하며, 문성공묘의
뒤편에 있는 전사청은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소수 서원에는 국보 제 111 호의 안향의 초상과 보물 제 717 호의 주세붕
초상 등 보물 급의 영정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어서, 1975 년에 영정각을
건축하였으며, 현재 이 보물들은 소수 박물관에 보관하고, 소수 서원의
영정각 안에는 모사본들을 비치하고 있다.
영정각 안의 초상들 --- 좌측은 주자 ( 朱子 ) 우측은 안향 ( 安珦 )
좌측은 주세붕의 초상화, 우측은 한음 ( 漢陰 ) 이덕형 ( 李德馨 ) 의 초상
허목과 이원익의 초상
전사청 ( 典祀廳 )
일영대 ( 日影臺 ) --- 해 시계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수 서원 ( 紹修 書院 ) 의 사료관 ( 史料館 )
소수 서원 ( 紹修 書院 ) 의 사료관의 내부
영주의 소수 서원은 UNESCO 의 World Heritage 에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소수 서원의 건축 양식과 유물
소수 서원이 들어선 곳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 선생이
어릴 때 수학하던 곳으로서, 서원의 뒤로는 영귀봉 ( 靈龜峯 ) 이
있고, 서원의 앞으로는 죽계수 ( 竹溪水 ) 의 맑은 물이 흐르며,
주변에는 연화산 ( 蓮花山 ) 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시대의 서원의 대부분은 앞쪽에 학사를 두고 뒷쪽에 묘당을
세우는 전학후묘 ( 前學後廟 ) 의 배치 양식을 따랐는데, 소수
서원의 건물 배치 양식은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 라고 하는
우리나라 전통의 위차법에 따라서 서묘동학 ( 西廟東學 ) 의 양식을
택하였다.
소수 서원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유물로는 국보 제 111 호의 안향의
초상과 보물 제 717 호의 주세붕 초상, 보물 제 485 호의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 大聖至聖文宣王殿座圖 ), 이원익 영정,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 238 호의 서총대친림연회도
( 瑞蔥㙜親臨宴會圖 ) 등이 전해져 내려온다. 또한, 명종이 친필로
써서 내린 소수 서원의 편액은 경상북도 유형 문화제 제 330 호이고,
주세붕과 이황의 친필 홀기 ( 笏記 ; 의식이 진행되는 순서 및 내용
등을 기록한 문서 ) 와 죽계지, 추원록 ( 追遠錄 ), 육선생유고
( 六先生遺稿 ), 가례언해 ( 家禮諺解 ) 등의 목판은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 331 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창건할 당시에는 유가의 기본 서적
500 여 권을 마련하였다 하며, 명종이 소수 서원의 친필 편액을
내려 주셨을 무렵에는 서원에 639 책 이상의 서책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 세월이 흐르면서, 이 서책들은 산실되어,
오늘날 사원에 남아 있는 양은 그렇게 많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소수 서원 ( 紹修 書院 ) 의 역대 원장들 및 원임들의 임사록 ( 任事錄 )
심원록 ( 尋院錄 ) --- 소수 서원의 방문자 List
서원의 선생님들의 연보 ( 年譜 ) 와 문집 ( 文集 ) 들
한국 도학의 계보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많이 보인다 안향, 이색, 정몽주, 김종직, 조광조, 이퇴계, 이율곡, 류성룡, 허목, 정약용 등
소수 서원은 4,000 여명의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빼어난 인재들이 많았다
소수 서원에서 수학하여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명단
소수 서원의 연혁
1542 년 : 풍기 군수 주세붕 ( 周世鵬 ) 이 숙수사 ( 宿水寺 ) 옛 터에
안향 ( 安珦 ) 의 사묘 ( 祠廟 ) 를 세우다.
1543 년 : 백운동 서원 ( 白雲洞 書院 ) 을 창건하고 첫 원생들을 받다.
1547 년 : 경상도 관찰사 안현 ( 安玹 ) 이 서원의 경제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하다
1549 년 : 픙기 군수 이황 ( 李滉 ) 이 서원을 국가의 공식 교육 기관으로
인정 받고자, 사액 ( 賜額 ) 을 요청하다
1550 년 : 명종 임금의 친필로 소수 서원 ( 紹修 書院 ) 이라는
사액을 내리다.
1633 년 : 주세붕을 문성공묘 ( 文成公廟 ) 에 추향하다.
1871 년 :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다.
1888 년 : 마지막 원생들을 받다.
1963 년 : 소수 서원이 사적 제 55 호로 지정되다.
2004 년 : 문성공묘와 강학당이 국가 문화재 ( 보물 ) 로 지정되다.
2011 년 : 소수 서원이 UNESCO 의 세계 문화 유산 잠정 목록에 오르다.
소수 서원 ( 紹修 書院 ) 의 사액을 받게 된 역사적 배경
1548 년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백운동 서원
( 白雲洞 書院 ) 을 공인화 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1549 년에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에게 백운동 서원에 조정의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여,
백운동 소수 서원 ( 白雲洞 紹修 書院 ) 이라 명명하였다.
이보다 약 90 년 전인 세조 3 년 ( 1457 년 ) 에 경상도의
순흥에서 딘종 복위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금성대군 ( 錦城大君 ) 과 함께
모의를 하였던 순흥 안씨들을 비롯한 수많은 영남 선비들이
처참하게 도륙을 당하였고, 그 피가 죽계천 ( 또는 죽계수 )
을 덮어서 10 리를 흘러갔다고 하며, 죽계천에서 그 핏물이
끝나던 곳의 또다른 지명을 오늘날까지도 피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이런 처참한 사건의 이후로 순흥부는 풍기 군의 한 면으로
강등되어 편입되었고, 순흥의 향교는 폐지되었으며, 그 이후로
한 동안은 순흥 근방에서 사람의 씨앗조차 찾아 볼 수 없게
황폐해졌다고 한다. 그 뒤로 수십년간 조선의 조정에서는
사림의 향촌 활동을 위험하게 생각하여 억압하는 정책을
펴게 되었다고 한다.
명종 때 풍기 군수 주세붕의 청원에 의하여 임금의 친필로
내린 백운동 소수 서원 ( 白雲洞 紹修 書院 ) 의 소수 ( 紹修 )
라는 문자는 한문의 글 "旣廢之學 紹而修之" 또는 우리 말로
"이미 폐하였던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게 한다" 는 뜻을
품은 글로부터 紹 자와 修 자를 따내서, 다시 이어서 닦는다는
뜻의 소수 서원 ( 紹修 書院 ) 이 된 것이다. 소수 서원은
명종 5 년 ( 1550 년 ) 에 편액을 받았고, 명종은 편액 이외에도
사서오경 ( 四書五經 ) 과 성리대전 ( 性理大全 ) 등의 책과
노비를 내렸으며, 서원에 딸린 토지에 대한 면세 혜택을 주었고,
서원의 입학 정원도 10 명에서 30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조정에서 서원이 선현들을 흠모하는 봉사 활동과
후학들을 가르치는 기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 되었고,
점차 서원은 사림의 향촌 기구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퇴계 선생 문집 ( 退溪 先生 文集 )
퇴계 선생 문집 ( 退溪 先生 文集 ) 은 조선의 성리학의 발달의
기초를 형성한 퇴계 이황의 문집으로, 조선 중기의 사상사 연구,
특히 성리학의 이해 수준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충효 교육관 ( 忠孝 敎育館 ) 그리고 소수 서원 관리 사무소
안녕하세요 ?
영주의 소수 서원은 우리나라의 조선 시대의 최고의 elite
들이 조상을 흠모하고 후학들을 가르치고자 하였던 열정을
담아서 키워 냈던 사당 겸 사설 교육 기관으로서, 수많은
원생들을 배출하여 당시의 정계와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값진 문화
유산으로 충분히 평가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소수 서원의 탐방 기록을 마치고, 이 web series 의
마지막 편인 다음의 제 3 편에는 영주 소수 서원의 바로 옆에
나란히 있는 선비촌을 둘러 본 기록을 전하여 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