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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공주의 붓글씨 한점

이예경 2015. 4. 21. 16:34

정명공주

 

당신을 처음 만난 곳은 간송미술관 1층 전시실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쟁쟁한 명필들 중에서 당신은 ‘華政’이란 두 글자로 서있었습니다.

사방 크기 73cm, 해서로 쓴 반듯한 글씨는 장지 한 장에 하나씩 들어 있어서,

이것이 과연 붓으로 쓴 글씨인가 싶게 굵고 힘차보였습니다.

당당하고 막힘없는 운필의 기세에 압도당한 채 있다가 이런 글씨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는데,

이번에는 이름을 읽다가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공주라니요.

 

정명공주(貞明公主),

당신을 찾아 나서게 한 것은 큰 나무 밑동 같은 붓글씨 한 점이었습니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토록 ‘빛나는 정치’에 대해 절절하면서도 절제된 염원을 담아냈을까요.

선조의 열 한 명의 딸들 중 유일한 공주였던 당신,

부왕인 선조는 한석봉체의 대가였고 어머니 인목왕후 역시 명필이셨으니 당신의 필체는 타고난 것이었겠지요.

그뿐이라면 아하, 그렇구나 하고 말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살아낸 세월-선조 36년(1603)에 태어나 숙종 11년(1685)까지-을 헤아려보다가

왕만 해도 여섯 분을 거친 것을 알고는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세월이 어찌 평탄키만 했을까요.

 

어머니가 당신을 잉태하던 때부터 혹 아들일까 두려워하는 이들의 방해로 세상구경 못할 뻔도 했지만,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지 알게 된 것은 늙으신 부왕이 승하 하시면서였을 것입니다.

계비였던 어머니보다 아홉 살 위인 당신의 이복오라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였지요.

늦게 얻은 적통(嫡統)인 당신과 영창대군을 “불쌍히 여기라“던 부왕의 유교(遺敎)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폐출되어 서궁에 유폐되었고 당신들도 따라 갇히는 신세가 되었으니까요.

 

그러는 동안 외가는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대역모죄로 누명을 쓰고 죽은 것도 모자라 부관참시까지 당하고,

외할머니는 제주로 귀향 보내져 술을 빚어 생계를 꾸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최악의 사건은 당신보다 세 살 어린 영창대군이 역모죄로 강화로 보내져 사사당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비접 나가는 것이라며 상궁 등에 업혀 나갈 때 이미 일어날 일을 짐작하셨을 당신과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그 날의 가슴 찢어지는 정경이 보이고 들리는 듯합니다.

상궁의 등에 업힌 채

“웃전과 누님 먼저 서시고 나는 뒤에 서겠노라”고 소리치며 우는 대군을

광해군 쪽 내인이 문 밖으로 밀어내고 문짝을 닫아버리던 그 때,

황망해할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두 분은 끝내 혼절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천지간에 분하고 억울하고 애매한 처지를 변명하거나 호소할 데 없이

언제 더 나쁜 일이 닥칠지 모르던 10년의 세월,

다시는 눈 뜨지 않기를 바라던 아침은 얼마나 많았을까요.

지금은 덕수궁이라 부르는 서궁에서 당신의 세월을 생각하며 걸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도 목단 꽃에는 나비가 앉았다 가고, 새들은 담장 위를 자유로이 넘나들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더 무심했을 세월을 당신은 어떻게 보냈을까요.

 

서궁에 계실 때

“한묵(翰墨)을 즐긴다는 것은 부인의 할 일이 아니라고 하여 덮어두었으나

여공(女功)의 여가 때에는 혹간 마음을 두었다”고 하셨지만,

어찌 길쌈질만 하며 문필을 멀리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답답하고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길은

명필이셨던 어머니의 지도 아래 서도에 매진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기법의 연습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지요.

벼루에 물을 담아 먹을 가는 일부터가 도에 들어가는 길이니

한 가지인들 소홀히 할 수 있었겠습니까.

글씨에 몰입하는 일이야말로 모진 세월을 견디며 당신이 스스로를 지키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부왕의 서손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한 인조반정과 함께 당신들의 감금의 세월은 끝났습니다.

대비가 된 당신의 어머니는

광해군의 죄 서른여섯을 물어 그를 폐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때가 1623년, 당신이 스물한 살의 나이로 영안위 홍주원에게 하가(下嫁)한 것도 바로 그 해였지요.

 

당신에게 또 한 번 위기가 닥친 것은 어머니가 죽은 뒤

왕(효종)이 병이 났는데 공교롭게도 궁중에서 나온 백서(帛書)의 내용이 흉측한 저주를 담고 있어서

당신까지 의심을 받게 되면서였습니다.

궁인이 고문을 받아 죽고 계집종이 잡혀 가면서 화가 어디까지 미칠지 헤아릴 수 없던 때,

당신은 서궁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 같아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때 왕에게 지극한 말로 간(諫)하여 당신을 구한 사람은 영의정승 최명길이었습니다.

“선왕의 골육으로는 다만 공주가 있을 뿐인데

옥사(獄事)를 일으킨다면 그 당시 반정한 뜻이 어디 있으며,

지금 만일 분명치 못한 일로서 연루하여 공주가 놀란 마음이 상하여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도록 한다면

오늘날 주상이 된 자가 그 책임을 어찌 면하겠으며,

장차 어떻게 선왕을 뵐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직언이 왜 이렇게 코끝을 찡하게 하면서 숙연한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지요.

 

결국 이 일은 숙종이 즉위하면서 당신을 종친으로 다시 우대하게 된 것으로 끝났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드물게 복락을 누린 공주라고 말합니다.

아들 넷에 딸 하나를 잘 키우며 번창한 일가를 이루고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더구나 당신이 여든셋으로 수를 다했을 때,

“임금이 매우 슬퍼하며 예장(禮葬)하게 하고 녹봉은 3년을 기한해 그대로 주게 하셨다” 하니,

당신은 정말 인덕이 있는 분, 잘 살아낸 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냥 타고난 복일까요.

지혜롭고 어진 심성의 덕도 크겠지만,

혹독한 세월의 용광로를 거치는 동안 내공이 쌓여서가 아닐까요.

당신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으면서,

당신이 막거나 피하거나 고칠 수 없는 것들은 견디어 내는 것이 이기는 길임을 아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두려움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신과 증오를 가져오는 것을 보고,

복수가 더 큰 복수를 불러오는 것을 보았기에

허망한 복수에 매달리는 대신 관용의 마음을 키우고

스스로 삼가면서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음전한 여인처럼, 때로는 여장부처럼.

 

당신을 찾아 나섰다가 알게 된,

당신이 떠난 뒤의 일들을 이야기해드릴까요.

좋고 나쁘고 슬픈 일들이라면 안 들어도 알 일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조 초년에 당신이 왕으로부터 받으셨던 하의도 땅 24결은 오랜 세월 문제가 되어오다가,

훗날 농지탈환운동으로까지 커져서

‘민중이 겪은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대변하는 일’이 되어버렸답니다.

혹 이런 일을 예견하셨다면

땅 받기를 한사코 마다하셨거나 자식들에게 욕심을 경계하도록 단속하셨겠지요.

그렇고말고요. 병자호란 때였던가요.

강화도로 피난 가시던 길에

백성들을 배에 태우기 위해 가져온 재물을 강에 던지신 분이 당신이 아니었습니까.

 

좋은 일도 있습니다.

인조의 특명으로 증수(增修) 되어 오래 사셨던 집 있지요.

아드님이 물려받아 ‘사의당’이라 이름 지었는데,

6대 150년 세월동안 도성의 이름난 저택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당신의 후손이 쓴 ‘사의당지’는

지금도 조선시대 사대부문화를 읽는 문화박물관 역할을 톡톡히 한다고 합니다.

뜰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거저 심는 법이 없었다는데,

그런 일은 당신으로부터 보고 배운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차마 말하기 어려운 슬픈 일도 있습니다.

당신을 고조모라고 부르는 이의 딸이

윤5월 땡볕 뒤주 속에서 죽어가는 남편을 속수무책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운명의 여인 혜경궁홍씨라고 하면,

당신은 또 유월 어느 하루 어린 동생을 사지로 보내던 날이 생각나 참혹한 마음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진 세월을 잘 견디어낸 그 여인이 바로 정조의 어머니라고 하면 위안이 될까요.

 

다시 당신의 ‘華政’ 앞에 섭니다.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빛나는 정치’에의 바람은

시절이 달라도 마찬가지여서 옷깃을 다시 여미게 됩니다.

 

                                (계간 수필 여름호에 실린 글입니다.)